5. 모든 것이 나의

<동그라미 찢기> 5

by 김민주

겨울이 되긴 했는지, 눈이 내렸다. 첫눈이 내리면 괜히 쓸쓸한 와중에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그래서 그 들뜬 마음을 어찌하진 못하고 창문을 열어 눈이 내리는 것만 망연히 보고 섰다. 그러다 대뜸 창틀에 기어올라 외창을 열어젖힌다. 몸을 반쯤 밖으로 내놓고 매달려 있다가, 들뜬 마음에 몸을 실어 마치 날기라도 할 것처럼 뛰어내린다. 쿵 소리를 내며 하얀 바닥 위로 떨어졌다. 발바닥부터 시작된 충격이 몸을 흔들며 올라가 머릿속을 울렸다. 잠시 서서 하얗게 질렸던 시야가 걷히길 기다린다. 한가득 내린 첫눈 덕분에 허옇기만 한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허연 땅을 보면 괜히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법이다. 흔적을 남기는 방법 중 쉬운 것이 발자국이겠다 싶어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닿은 눈이 나의 체온에 의해 슬슬 녹아들어 가는 게 느껴진다. 한 발자국을 옮기기 위해 온몸의 근육이 연쇄적으로 움직인다. 그 생생한 움직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아있는지 깨닫는다. 그것이 매번 새롭고 경악스러워서 번번이 온몸을 파르르 떤다. 그렇게 떨리는 몸을 끌고 계속 점을 찍었다. 나의 시선은 방향을 만들고, 그 방향을 따라 발자국이 이어져 길이를 가진 선이 되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도니 쿵 소리를 냈던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익숙한 것과, 그것이 강해지며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좋아하니 그 첫 한 바퀴를 따라 돌고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활짝 열린 창틀에 기댄 채 쉼 없이 돌고 있는 나와, 내가 만드는 동그라미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점 하나하나의 모양과 방향을 관찰하고, 그것들이 이어진 선을 그려보고, 완성된 형태에 이름을 붙인다. 나는 아래에서 돌고 있는 나에게 그것이 '동그라미'라고 알려준다. 크고 무거운 목소리로 '동그라미'라고 외친다. 그러곤 창문에 매달려 선 채 그 동그라미를 구성하고 있는 한 발 한 발의 점을 바라본다. 형태는 선이 되고, 선은 점이 된다. 그렇게 동그라미가 찢어진다.


내가 만든 찢어진 동그라미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부재한다. 아니.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부재할 수 있다. 허상의 세상 안에서 무언가의 존부를 상상하는 것에는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으니 마냥 무책임하기만 해도 된다. 혹은 무책임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지난 화에서 얘기했듯이, 비는 '비'가 아니어도 된다. 비를 '구름'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엄마에게 비는 왜 '비'냐, 묻지 않을 수도 있다. 동시에 나는 영원히 온전한 나일 수 있고, 온전한 '나'가 아니어도 된다. 비가 '구름'이 되어도 그 본래의 실체가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나로도, '나'로도, '내가 아닌 나'로도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선 엄마에게 사랑을 묻지 않아도 괜찮다.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고, 나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고, 나의 사랑을 부정해도 괜찮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맞다. 이곳엔 그렇게 사랑이 있다. 의심과 부정을 한 몸에 받는 모든 사랑이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구태여 엄마를 붙들고 서서, 그간의 서러움과 아쉬움을 담아서, 엄마에게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는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눈밭 위를 걷고 있다. 온 발바닥이 빨갛게 식어 아플 지경이다. 이 한 발자국 안에 나의 온기가 얼마나 빼앗겨 들어갔는지 상상한다. 하지만 이제 온기 없이 식었으니 눈바닥도 더 이상 녹는 일이 없었다. 한편 창문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여전히 멀뚱히 그 아래의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곳에 서서 한 몸을 매개로 전해져 오는 통증을 느끼고 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한심한 몰골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찢어진 동그라미의 세상에 존재하고 부재하는 수많은 것들이, 내가 그곳을 상상하면서 그곳에 있어야 하고 그곳에 없어야 하는 온갖 사랑이, 그 안에서 내가 책임 없이 저지르는 행태가, 나의 발자국을 따라 만들어진 동그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그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세상의 빛도 닿지 않는다. 그런 곳에 나는 비와 사랑을, 나와 엄마를, 무책임하게 던져 넣었다.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곳에다가. 단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나의 비와 사랑이 그런 곳에나 있는 것이라고 아주 쉽고, 아주 어렵게 그런 만행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눈밭 위를 걷는다. 발자국을 남겨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다. 멀찍이 서서 동그라미에 속한 점을 하나하나 응시하는 것으로 동그라미를 찢어놓는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살기 위해서 일어나고 있고, 내가 살아 있어서 세상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마치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처럼 있는 것과 없는 것, 삶과 죄악감 사이를 돌고 돈다. 있기 위해 없어야 하고, 없기 위해 있어야 하며, 살기 위해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지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채 절대 지겹지 않은 체 하며 눈밭을 걷는다. 깊숙이 꺼져 들어가는 절벽을 내려다본다. 그 아래의 비와 사랑, 나와 엄마를 절벽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런 때에는 빛도 닿지 않는 그곳에 있을 많은 것들이 그곳에 있다는 안도감을, 빛이 닿는 곳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에 대한 끔찍한 책임감을 가지곤 한다. 창문에 올라선 다리가 자꾸 떨린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창틀을 꼭 쥔다.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걸 잡아 쥔다. 동그라미가 찢어지고 있을 때에.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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