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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양파씨 Aug 21. 2019

아프리카에서 슬럼프를 마주쳤을 때

어떻게 이겨낼까? 신용카드도 마구 못 긁는데.

슬럼프, 너란 놈은 아프리카까지 끈질기게


그럴 때가 있다. 정말 다 싫을 때.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내가 짜증 날 때. 뭘 해도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하고 미래가 적막, 암울하게 느껴질 때. 말도 하기 싫고, 누구도 만나기 싫고, 웃음기는 사라지고... 그렇다고 정작 혼자 있으니 시멘트에 난 민들레처럼 외로울 때. 왜 기분이 나쁜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 설명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거나 바보 같을 때. 그나마 들어주는 사람도 정체모를 한숨과 불평을 듣다가 지쳤을 때. 그냥 이불속에 코를 박고 울고 싶을 때.


한국에서는 슬럼프를 겪었을 때 어떻게 이겨냈었던가.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막상 떠올리려니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슬럼프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이겨낸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그냥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걸까. 아님 그냥 인생이 슬럼프 그 자체였던 걸까? 아마도 한국에 있는 나였다면 집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거나 좋아하는 카페에 몸을 숨기고 책을 읽었으리라. 차를 끌고 외곽으로 나가거나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겠지. 친구들을 만나서 디저트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열심히 욕을 해댔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백화점에서 쓸데없는걸 사느라고 카드를 열심히 긁는 걸로 풀었을 테다.

문제는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내가 (과)소비요정이면 뭘 하겠는가. 소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데. 여기는 좋아하는 카페도 없고(카페가 아예 없고 식당에서 커피를 마신다), 자전거는 언감생심, 혼자서 산책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원도 없고, 게다가 차랑 백화점??은 말해 무엇하랴.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한국에서 하던 방법대로 풀 수는 없다. 더 가슴이 옥죈다. 마음이 어두운데 어둠을 달랠 방법을 몰라서, 그 길이 없는 거 같아서. 갑자기 이런 답답한 곳에 선택해서 온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하나같이 그만두고 돌아오란다. 내가 말라리아에 걸린 걸 알게 된 엄마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면서 귀국을 종용했다. 엄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말은 나를 그저 더 슬프게만 했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가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중도 포기자가 되는 기분이다. 두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계속하기도 싫다. 나머지 연장한 1년을 행복하지 않은 채로 꾸역꾸역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엔 1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지금 돌아가는 것은 옵션이 아니고, 전혀 위로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약한 나를 더 악화시키는 선택지다.


슬럼프의 정체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자면 내 이번 슬럼프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은 아프고 나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다. 건강이 나쁘니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말라리아 기생충과 한 침대에 누워서는 초록 야자수도 파란 하늘도 노란색 달콤한 파인애플도 회색빛으로 보이는데. 일단 말라리아는 거의 나았고 제 사이클을 찾으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거였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처음 말라리아로 아팠고 나아봤으니, 다음번에는 더 잘 이겨낼 수 있을 수도 있다. 의사도 처음 말라리아 약을 먹은 거라, 간수치가 더 안 좋은 거라고도 했다.

다음은 현재 지위에 대한 불만족이 계속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UNV로서 월급이나 지위에 큰 불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올해가 JPO에 지원 가능한 마지막 해라 몇 달 전부터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아비장에서 토플시험을 치르는 건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시험 도중 시스템 다운으로 수험생들 모두 갇혀서 두 시간이 넘게 멍 때려야 했다. 산전수전 끝에 겨우 서류 지원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몇 달간 여기에 에너지를 다 쏟았는데 서류합격도 못한다면 정말 슬플 거다. 하지만 이것도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불안감 때문에 우울할 이유까진 아니다. 그럴 시간에 면접이나 준비하는 게 이론적으로 더 옳다.

사실 하나씩 논리적으로 따져 생각해보면 내가 우울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내가 어떤 마음 가짐이냐,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저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특히 이 코트디부아르라는 낯설고 자원이 제한된,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말이다. 푸념하고, 짜증내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낼 수는 없었다. 오후 두 시 반이 되도록 시체처럼 소파에 누워 있다가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엉덩이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겨우겨우 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예상외로 아주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을 깨우는 것으로 요리만 한 게 없다
죽어있던 감각 일깨우기


일단 폴에 가서 카페라테를 한 잔 마시고 게으른 정신을 깨웠다. 근처의 과일시장에 가서 아보카도, 토마토, 파인애플을 장만했다. 신선한 아보카도의 배를 가르니 연초록색 속살이 나왔다. 아주 적당하게 익은 아보카도를 고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보카도가 생각처럼 익지 않아서 요리가 망한 것도 여러 번이다. 부드러운 아보카도를 포크로 으깨는데 꽤 기분이 좋았다. 꼭 어렸을 때 엄마랑 같이 감자 샐러드를 만들 때 같다. 채 썬 양파, 토마토, 마늘, 레몬즙을 섞어서 과카몰레를 만들었는데 초록색 냄새가 아주 향긋했다. 바게트 빵을 썰어서 과카몰레를 듬뿍 얹어 입안에 넣으니 신선하고 촉촉한 야채들이 기분 좋은 미각을 일깨웠다. 아, 아프고 나서 미각이란 감각을 오랜만에 사용한 느낌이다.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3개월이 넘도록 손도 대지 않았던 오징어채를 꺼냈다. 새빨간 고춧가루와 올리고당에 조곤조곤 버무려냈다. 물론 원래 오징어채만 먹어도 맛있으니 망할 일이 없었지만, 처음 만든 것 치고는 달콤하고 쫄깃한 게 꽤 괜찮아서 기분이 우쭐해졌다. 어렸을 때 방금 한 밥이랑 오징어채, 김만 있으면 밥을 두 공기도 뚝딱 해치우곤 했었다. 빨간 밑반찬을 보니 입맛이 돌았다. 레몬청을 만들려고 레몬을 씻었다. 노란 레몬을 씻는 것만으로도 새콤한 감각이 뇌를 자극했다. 이렇게 작은 것들이라도 나 혼자 해내는 기쁨을 느끼니 성나 있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온몸의 감각세포들도 되살아났다.


요리며 집안일에 흥미를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여태껏 밥은 그저 배고프니 먹는 거였다. 하지만 신선한 로컬 과일과 야채를 씻고 자르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왠지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과카몰레를 먹으며 내 기분을 글로 한자씩 써 내려갔다.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어보고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기분일까 눈치를 보는 것에 비해 나 자신의 감정은 되려 무시할 때가 많지 않았던가. 단 한 시간이라도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끄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려 노력했다.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던 핸드폰이 조용해 지자 방 안에는 밖에서 떠들고 노는 아이들의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찼다. 햇빛과 새소리도 들어왔다.


소비로 점철되던 스트레스 관리법은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법인 적이 없었다. 나도 그걸 알고는 있었다. 뭔가를 샀을 때의 짜릿한 기분은 아주 잠깐이다. 그 짜릿한 기분을 계속 느끼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소비가 필요했다. 10만 원을 썼을 때의 자극에는 점점 무뎌져서, 같은 자극을 느끼려면 점차 20만 원, 30만 원을 써야 했다. 그게 곧 백만 원이 되고 이백만 원이 되는 건 아주 순식간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스트레스를 받았고 슬럼프를 겪고 있으니 이 정도를 소비하는 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게 된다.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소비로 이어지고, 카드값은 계속 나를 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누군가 그랬던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려고 명품가방을 산다고. 할부라도 갚고 있어야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며.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넋두리이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소비는 곧 족쇄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해결안을 찾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나도 아직 정말 슬럼프에 대한 답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찾기 위해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에 스스로 칭찬을 해주려 한다. 조금씩 나 자신을 더 공부하고 단단하고 견고해지기 위해. 어쩌면 항상 과소비로 이어지던, 또는 과소비의 좋은 핑계가 되었던 슬럼프란 놈은 아프리카에서야 제대로 나에게서 돌봄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PS. 그 외에 내게 용기를 준 것들

베네딕트 컴버비치의 감동 연설 

좋은 음악, Danier Powter의 Bad day

요리 똥손인 내게 희망을 준 유튜브 채널: 하루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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