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크리스마스 휴가
유엔에서는 신입직원들도 1년에 30일의 휴가를 받는다. 주말을 붙여서 쓰면 거의 한 달 반 동안을 놀 수 있다. 국제기구의 특성상 가족들이 해외에 있는 경우가 허다해 보통 휴가를 가족들과 보낸다. 근무를 시작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 기간 파리로 일주일간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놀러 갈 생각 만으로도 부푼 마음이 뽀글뽀글 올랐다. 아프리카-파리 노선은 체크인 수화물을 2개까지 허용하니 제대로 쇼핑을 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비장 공항에 도착했는데 아주 인산인해였다. 가족을 만나러 유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파리에 동생이 살고 있는 회사 동료, 자뚜에게서 콩 배달을 부탁받았다. 파리는 콩이 그렇게 비싸단다. Corsair 에어 기내식 1.5번(밥 한번, 간식 한번) 먹고 나니 금방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에서 파리로 오는 항공편은 대부분 오를리 공항을 통한다. 오를리 공항 출국장은 아프리카에서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파리까지 어떻게 이동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 중국인 아저씨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파리 놀러 왔어요? 나는 여기서 여행사 운영하고 있는데"
"네~ 휴가차 왔어요."
"파리로 가면 제가 차가 있으니까 데려다 줄게요. 다른 중국인이 2명 더 있어서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할 거거든요. 저렴하게 30유로에 집 앞까지 태워줄게요."
카카오톡 아이디를 알려주고는 차가 필요하면 연락하란다. "30유로로 숙소까지 간다니 왠지 좀 괜찮은 것 같은데?" 고민을 했지만,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는 건 좀 꺼림칙해서 택시를 타러 갔다. 근데 이게 웬 걸. 오를리에서 파리로 가는 택시는 모두 정액으로 30유로를 받는 것이 아닌가. 혼자 그냥 택시 타도 30유로였다. 아비장이나 파리나 현지 사정 잘 모르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장사는 매한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겨울 숙소까지는 택시로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차가운 겨울바람. 멀쩡히 창문이 닫혔다 열리는 택시. 모던월드였다.
자뚜 동생에게 전해 줄 콩자루가 잔뜩 든 짐가방 두 개를 짊어지고 낑낑 건물 5층까지 올라갔다. 파리의 오래된 건물은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계단도 너무 오래돼서 곧 무너질 거 같은 스릴을 보너스다.
현관문 안쪽에서 열쇠로 잠가야 문이 잠기는 시스템, 보일러를 따로 설치해야 따신 물이 나오는 욕실, 페인트로 칠해진 벽장 까지 아비장의 집안 내부까지 프랑스에서 그대로 옮겨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즐거워서 슬픈
여느 파리 시내의 창가 풍경 나보다 3시간 후 샤를 드골로 도착한 남자 친구도 택시를 타고 곧 숙소에 도착했다. 3개월 만에 만난 우리지만 매일같이 스카이프와 보이스톡으로 연락을 하니 그저 맨날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12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프랑스 파리라니! 세 번째 온 파리지만 여전히 두근거렸다. 추운 길거리에서 서서 마시는 뱅쇼, 핫초코부터 달달한 마카롱과 굴요리, 크리스마스 마켓까지, 파리는 봐도 봐도 그리운 곳이다.
(좌) 샹젤리제 거리 (중) 생산된 지역마다 맛이 다른 굴 (우) 마카롱 천국
며칠을 신나게 놀고 나자 슬슬 크리스마스 휴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 아비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일요일 저녁에 다가올 월요일을 속절없이 기다리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놀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한인들이 말하길, 한국인 직원을 고용하면 보통 1년 후 한국에 휴가를 가는데, 휴가에서 돌아온 후 얼마 못 버티고 퇴사한다고 한다. "휴가 다녀오면 왜 그만두지?" 했는데 내가 막상 그 처지에 있어보니 왜 그런지 이해할 것 같았다.
아비장에 지낸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그곳 삶에 만족한다. 그럼에도 평생 당연하게 누려왔지만 아비장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것들 - 예를 들면 겨울, 깨끗한 공기, 깨끗한 길거리, 걸어 다니기, 나를 보고 시누아 시누와(중국인) 외치지 않는 사람들, 스타벅스, 단전 & 단수되지 않는 집, 빠른 인터넷... 당연한 권리들을 잃었다가 다시 잠깐 맛보니 이렇게 달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곧 기본권들을 다시 잃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헛헛한 기분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겨우 3개월에 이리 싱숭생숭한데 2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역시 2년으로 계약 연장을 못한다고 디렉터한테 말하는 게 나을까?" 하는 걱정까지 가버렸다. 종종 남자 친구는 나를 "걱정거리가 없으면 걱정을 찾으러 다니는 스타일"이라고 묘사했다. 그래, 일단은 걱정은 접어두고 휴가를 즐기는 게 우선이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와 크로와상으로 몸을 녹인 후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바로 뒤에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사람들이 밀면서 내가 속절없이 "어어어어~~"하는 찰나에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 순간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패딩 주머니 지퍼가 열리면서 낯선 손이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꺄!!!!" 10대 후반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흑인 소매치기는 내 핸드폰에 손이 닿기 직전이었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자 포기하고 의연하게 군중 속으로 미끄러져 살아졌다.
뒤돌아 남자 친구를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몇 초 지나서야 그가 그제야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느긋하게 들어오는 거였다. 알고 보니 나와 그 사이에 소매치기가 끼어들면서 내 주머니를 노린 거였고, 오빠는 급한가 보다 하고 그가 새치기를 내버려 둔 것이었다. 이어서 지하철로 들어오던 프랑스 사람들이 나더러 그 소매치기 봤냐며 안 당했냐고 걱정해주었다. 파리 사람들은 흔히 알고 있는 수법인 모양이다. 토끼처럼 놀란 가슴과 털릴뻔한 순간에 소매치기에게 시원하게 욕 한번 날려주지 못한 게 억울했다. 그래 유명한 소매치기의 도시, 집시의 도시, 그리고 2015년 테러까지, 파리도 아주 안전한 동네는 아니었지.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살면서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정말이지 파리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아비장에서는 길거리에서 꼬맹이들이 자꾸 시누와 시누와 놀리거나 아시아인을 많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뚫어져라 쳐다보아서 그렇지 소매치기를 당한 적은 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비장이 더 괜찮은 곳으로 느껴졌다. 나름 몇 달 살았다고 아비장은 "구역"처럼 느껴졌다. 유럽은 너무 익숙한 바람에 방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제야 저녁에 파리의 소매치기 수법을 유튜브로 찾아보면서 "그래그래!! 이따구 수법이라니까!!" 욕지거리를 혼잣말로나마 시원하게 해 줬다. 그 이후로는 방돔 시장이며 엄청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다녔다.
나의 집, 아비장으로
일주일은 금세 지나가서 귀국 날이 되었다. 남자 친구는 미국으로 가니 샤를 드골 공항으로,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니 오를리 공항으로 떠나야 했다. 공항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집 앞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3개월 전에 미국에서 처음 헤어질 때는 엄청 눈물이 났었는데 그래도 이번엔 눈물을 참는 데 성공했다. 오빠 피셜 자기는 택시 안에서 마음으로 울었다 한다.
한 동안 맛 못 보는 자본주의의 맛, 스타벅스 혼자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간다. 이상한 기분이다. 오를리 공항에서 스타벅스에서 한동안 맛보지 못할 미국식 자본주의 카페라테를 홀짝 마셨다.
맛나다.
오를리 공항은 집으로 돌아가는 아프리카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미 아프리카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비장의 길거리 저녁 9시, 아비장에 도착했다. 3개월 전에 처음 왔을 때는 저녁에 혼자 택시를 타는 게 무서워 일부러 오전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탔다. 그래. 그때는 공항이 그렇게 어둡고 칙칙하게 느껴졌었다. 지금 보니 웬만한 아프리카에서는 못 볼만한 괜찮은 공항이다.
짐을 찾아서 여유 있게 나오는데 세관도 나를 잡지 않았다(제법 현지인 포스가 나나보다 하하). 택시기사는 만세파를 불렀지만 당당하게 "5 천세파 이상은 안 냅니다!!" 했더니 기사가 금방 수긍했다. 너무 금방 수긍해서 속으로 혼자 놀라 했다. 아비장의 끈적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익숙한 길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하니 아... 어쩜!
아비장, 홈 스위트 홈 여느 여행 후 비로소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비장 홈 스위트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