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재능은 오직 '글쓰기'하나뿐인데, 기획 일을 어떻게 하나요?" 모 기획사에서 기획 일을 제안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나이 먹고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어떻게 다른 일을 더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후 일감이 똑 떨어져 손가락을 빨고 있을 때, 그 제안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갔다. 기획 일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된 순간이었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데 기획 일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은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당당하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나 자신을 다독이고 다독였지만, 어쩌면 이게 더 큰 기회를 만들어 줄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점점 더 커졌다. 돈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 같은 생각에 비참한 마음도 들었지만, 당당히 이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이 점차 비참한 마음을 이겨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에게 기획 일을 제안했던 사람에게 연락을 하여, 아직도 그 제안이 유효한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좀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제안할 당시에는 기획자가 부족하여 프리랜서인 나를 급하게 영입하려 했지만, 지금은 기획자를 채용하여 당장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털어버리고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나 역시도 다시 일감을 찾아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였다. 기획 일을 제안했던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당장 매체 하나를 맡아서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인간의 간사함을 나 자신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다시 일감이 들어와 정상 궤도에 오른 후였기에,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이 번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다시 또 손가락만 빨며 일감을 기다리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밤낮이고 주말이고 내겐 여유로운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들어나보자'는 심정에 '어떻게든 되겠지'싶은 마음만 더해졌을 뿐, 대책은 전혀 없이 제안자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급하게 일을 맡아줄 수 있냐고 대뜸 물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며,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질의응답의 시간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들어나보자는 마음이 조급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거절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어렵게 맞이한 기회였기에, 말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내가 맡은 일을 처리하는 데 지장을 받으면 안 되었기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을 끝내기 전에는 맡아서 하기 힘들다는 내용을 에둘러가며 밝혔다. 살짝 실망한 표정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제가 이런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타깝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연락을 하겠노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그날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때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인연으로 기획자 역할을 종종 수행하고 있다. 물론, 매끄럽게 진행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긴 아직 미숙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지만, 그 역할을 통해 금전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때로는 작가를 내가 직접 섭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오기도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될 때는 직접 내가 글을 쓰기도 한다. 기획자 일을 통해 작가의 일도 덤으로 얻게 되는 그런 기회도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수입도 덤으로 얻게 된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역시 진리의 말이다. 주구장창 끌고 오던 나만의 고집을 살포시 접고, 조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 일을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기획자 역할이라는 것이 작가의 역할과는 분명 다른 길이지만, 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마음보다는 내가 기획자 일을 하게 되는 순간 작가의 일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던 것 같다.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생각보다는 한 가지에 올인해야 한다는 전혀 근거 없는 걱정. 그 걱정이 판단력을 흐릿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건과 함께 나 자신도 조금은 유들유들하게 변한 것 같다. 고집을 피울 땐 피우더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대한 마음의 문을 열어 놓자고. 그렇게 마음이 서서히 변해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마음의 변화가 프리랜서로서의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기회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놓자.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바로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