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투왈 Aug 27. 2024

에밀 졸라(Emile Zola) 11

드레퓌스 사건



그들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무고한 한 유대인 대위를 스파이로 몰고 간 이 사건이 이스라엘 건국의 단초가 되리란 사실을.






* 1895.1월 드레퓌스는 프랑스로부터 
   추방, 종신유배형 판결을 받았다.
   수많은 군중이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그의 불명예 퇴역식이 거행됐다.
  - Le Petit Journal 실린 
    Henri Meyer의 '반역자'.
  

● 시대적 상황 참고
1789년 프랑스혁명
1870년 나폴레옹 3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 패배
1881년 선거, 공화주의 정당 다수 의석 차지
1887.1.27 파리 의원 보궐선거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쇼비니즘), 프-독일 간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던 시대적 배경(프-러는 동맹 체결)





프랑스, 독일 두 나라가 간절히 원한 땅 - 프랑스 알자스 지방[BY 여플 프렌즈]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 알자스 아름다운 경관으로 사랑받는 프랑스 동쪽의 알자스(A...post.naver.com



알프레드 드레퓌스, 그는 1859년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고,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종신형 유배'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땅이었고, 그는 프랑스인이다.

그 후 알자스는 1871년 보불 전쟁의 패배로 독일에 이양되었다. 그의 집안은 독일 땅에서 살 수 없었다. 맏아들에게 공장 운영을 맡기고 가족들 모두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사업을 포기했던 것이다.







*프랑스 방첩부대가 입수한 문서(1894.10.13. 촬영)

발견된 정보 유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이름의 첫 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됐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간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점, 독일 접경 알자스 태생이라는 점이 이유를 불문하고 그를 스파이로 만들었다.











1894년 드레퓌스 대위는 프랑스 추방과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고 악마의 섬으로 추방됐다.








* 악마의 섬은 1852년, 프랑스령이 된 이후 1862년부터 1939년까지 프랑스의 중범죄자들이나, 정치범들을 수용했다. 악마의 섬은 거기서 13년간 지내다 탈옥한 앙리 ‘빠삐용’ 샤리에(Henri ‘Papillon’ Charriere)의 1970년 자전 소설 ‘빠삐용’으로 악명을 높다.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 악마의 섬은 매우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 이 섬 은 급한 해류로 본토와 격리돼 있었고, 바다는 상어의 주요 서식지이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악마의 섬에는 약 100년 동안 6만여 명이 수용됐고, 살아남은 이는 약 2,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895. 2. 21일
그는 기아나의 적도 해안으로 가는 긴 항해에 오르게 되었다. 이 항해가 끝나는 날, 그는 악마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배 안 감방에 쇠사슬로 묶었다.
뒷날, 드레퓌스는 악마도의 유폐 상황을 기록했다.








"밤이 되면 쇠창살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밤에는 나에게 이중버클이 채워졌다. 이중 버클이란 청교도 개척민들이 불량배를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에 감금할 때 쓰던 것과 비슷한 족쇄다."

그이 아내 뤼시는 알프레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아내임이 자랑스러워요... 참을 수 없이 외로울 때면, 서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면, 소중한 옛날 기억을 되살리곤 해요.... 나는 절대로 믿어요. 그리고 내 믿음을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요."







*1893년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 1면에 실린 반유태주의 캐리커처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는, 나라 전체가 두 동강이로 나눠졌다. 친구들 간에 많은 결투가 벌어졌다. 결투와 관련해서 많은 자살이 발생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싶어 했다. 아주 비판적인 만화들도 나타났다. 최대의 히트작은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분열을 풍자한, 1898년 2월 14일 자 두 컷으로 된 만평이었다.







대가족의 식사 시간에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결국은 이야기했다”라면서 온 가족이 난장판이 되도록 싸우고 있다.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