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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투왈 Aug 28. 2024

에밀 졸라(Emile Zola) 13

시오니즘(Zionism)



1899년 9월
드레퓌스는 재심 판결에서 '금고 10년형'과 특별사면이 선고 됐다. 세계는 크게 분노했다. 각 국에서 데모가 일어났고 프랑스 국기를 불태웠다. 파리 국제박람회를 보이콧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재심을 요구했다.

클레망소는 특사를 반대했다. 특사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 이상 악마의 섬에서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낼 수 없었다. 드레퓌스는 특별사면을 받아들였다.





훗날, 드레퓌스의 악마도에서 쓴 일기가 출간되었다. 세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레냐크는 드레퓌스사를 발간했다.
졸라는 소설 <진실>을 출간했다.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에서 판결이 있었다. 렌 군법회의 유죄판결은 오판이고 재심 없이 모든 유죄 판결을 무효 판시했다. 정부는 드레퓌스를 복권, 소령으로 승진시켰다.

같은 해 7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수여됐다. 12년 전 악몽 같은 불명예 퇴역식이 있던 곳이었다. 드레퓌스는 눈물을 흘렸다. 20여만의 환영인파가 운집했다.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 프랑스 팡테옹에서 에밀 졸라 이장식, 묘지

1908년, 에밀 졸라 팡테옹에 이장되었다.
1908년, 피카르 장군, 클레망소 정부의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자스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1930년, 독일 대사 슈바르츠코펜 장군 일기 <드레퓌스에 관한 진실> 발표했다.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

1998년 1월 13일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항의하여 '로로르(여명)'지에 명문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가 이성의 이름으로 한 무고한 인간에 가해졌던 인권유린의 대표적 예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졸라가 생전에 살던 집에서 현판식을 갖고 기념비를 헌정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의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들을 진열했다. 또 졸라가 안치된 팡테옹에서는 당시 왜곡된 공권력의 상징이던 법무부와 국방부의 수장이 참석해 다시는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될 것임을 다짐하며 졸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파리에 프랑스 곳곳에 크레망소 거리와 졸라의 기념비, 에밀 졸라 거리, 에밀 졸라 지하철역 등이 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은 끝나도 끝나지 않은 영원한 숙제를 남겼다.
드레퓌스 사후에도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치 논쟁에 있어 잊을만하면 뜨거운 감자로 남았다. '유대인 차별이 불러낸 사법농단' vs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하여 간첩을 무죄방면'이라는 두 주장이 끝없이 충돌했다. 
후자는 '드레퓌스가 실제로 간첩질을 했음에도 에밀 졸라를 비롯한 친유대계 지식인들이 들고일어나 무죄를 선고했다'라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이렇다 보니 드레퓌스 사건은  '끝없이 답 없는 논쟁'의 대명사가 되었다.(출처 나무위키)




반면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이라는 낙인은 지울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이럴 바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의 애국심이 그렇게 강한 것도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 극우 유대인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만 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땅은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모든 영역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1978년 니콜라스 할라스 원저의 이 번역서가 출간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이 책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으나, 사학과 전공 친구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 책은 전공자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나는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다음은 이 책에서 요약한 내용들이다.


● 주요 인물

- 알프레드 드레퓌스 1859-1935
 ; 유대인 혈통(헝가리 귀족 아버지)의 프랑스 포병대위


- 에스테라지 ; 프랑스군 대대의 지휘관, 스파이지원(아내의 병)

- 슈바르츠코펜  ; 프랑스 내 독일 대사관 무관,  죽기 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자신은 드레퓌스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

● 연도별 사건

1894년 9월 14일 명세서(프랑스 포병 정보) 발견
1894년 11월 19일 《라 리브르 파롤》'대역죄, 유대인 장교 체포' 갈등과 분열 시작

☆1894년 12월 19일 드레퓌스 반역죄, 종신형, 군적 박탈

1895년 2월 21일 기니아의 악마의 섬
1896년 3월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에스테라지 진범 지명

1898년 1월 13일 로로르 신문 '나는 고발한다.' 게재
1898년 7월 에밀졸라 유죄 판결-영국으로 망명(1899년 귀국)
1898년 8월 31일 앙리 중령(증거조작의 주범) 투옥 중 자살(에스테라지 영국 망명)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 사면, 복권 ×
1902년 9월 30일 졸라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가스중독사고로 사망

☆1906년 7월 12일 2차 재심 대법원 무죄 선고, 복권되어 소령 승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1935년 7월 12일 드레퓌스 사망(몽파나르스 묘지)
→ 사건을 계기로 정교분리

1902.7 3000개 가톨릭학교 폐쇄
1905 정교분리법 통과(콩브법)
1995.9.12 리베라시옹 신문 100년 만에 드레퓌스 무죄 선언

● 에스테라지 옹호 진영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 옹호자, 왕당파, 옛 귀족, 국가주의, 국수주의, 반유대파, 가톨릭, 우파

[인물]
-샤를아르튀르 공스 장군 ; 드레퓌스에게 문서 불러주며 받아 적으라
-베르티용 ; 인체측정
-장 카지미르-페리에 ; 대통령 → 펠릭스 대통령
-오귀스트 메르시에 장군 ; 국방부 장관, 관련증거 모두 없애라 명령
-부뤼커 ; 첩자 발굴, 독일대사관 잡역부인 바스티앙 부인과 접촉
-위베르 앙리 ; 제2국 참모장교, 군에 충성

※ 무죄 알면서도 숨긴 자들
-고드프루아 카베냐크 국방부 장관
-샤누안 장군 국방부 장관
-브리송 총리, 샤를 뒤퓌 총리
-쥐를랭당 ; 피카르 군법회의에 넘겨 달라 민간재판소에 요청
-에뒤아르 드뤼몽 ; 반유대주의 랍비
-오스카와일드(영국) 에스테라지와 친분
-에스네스트 르낭 1823-92 ; 회의주의자, 혁명이전으로 복귀하자.
-머르스 바레스 소설가, 불랑제 지지자, 국가주의 신조, 묘지경배
모든 국민이 참회자의 마음으로 망자와 대지 앞에 부복하여 그들의 정신을 들이마시자.
-국가주의자들 ; 신교도들은 완전히 다른 민족이다.
-카톨릭 과격주의자들
-쥘 수리 ; 무신론자들도 카톨릭으로 귀의하자
-람폴라 추기경 ; 바티칸 국무부 장관
-알베르 드 묑 ; 카톨릭지도자, 중세복귀주장

[언론사]
-라 리브르 파롤 ; 예수회(뒤락신부)가 자금 지원, 발행인 - 에두아르 드뤼몽
-라 크루아 ; 바일리 신부 창간
-씨발타 카톨리카; 예수회 기관지
-르 피가로 ; 편파적이다가 처음으로 에스테라지를 범인이라고 지목 보도


● 드레퓌스 옹호 진영
양심적인 지식인, 개신교, 사회당, 노동계급, 급진당, 공화당, 재심파, 좌파

[인물]
-뤼시 ; 드레퓌스아내
-마티외 ; 드레퓌스 형
-에드가르 드망주 ; 드레퓌스 변호사
-조르주 피가르 중령 ; 장 상데르 중령에게 넘겨받은 자료에서 1896년 무죄라 확신 → 공스장군에게 보고 → 묵살 → 알제리, 튀니지 파견 → 앙리가 정보국 장악 → 준장 진급 → 국방장관
-르블루아 변호사 ; 피가르 변호사
-쇠레르-케스트네르 상원 의원
-에밀졸라
-페르낭 라보리 변호사 ; 졸라변호
-알퐁스도데 작가
-프랑수아 코페 시인
-아나톨 프랑스 ; 제3공화국 비판자
-에밀 뒤클로 ; 파스퇴르 연구소 소장
-마르셀 프루스트
-클로네 모네
-장 조레스
-폴 브륄라 기자 ;사기꾼들이 사기를 찬미했고 협잡꾼들이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 대중은 죄인에게 호산나를 불렀으며 그 죄인의 죄는 다른 사람에 의해 속죄되고 있었다.
왈데크총리, 갈리페 장군 ; 일반사면 고려

[언론사]
-르 피가로 1897.12 반드레퓌스로 전향
-로로지/편집장 조르주 클레망소 ; 나는 고발한다 게재
-라 프롱드 ; 세브란 여사 발행인(극우에서 극좌로 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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