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과 나
1886, 파리
졸라의 소설 <작품>이 발표됐다. 불행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림처럼 묘사한 글이었다.
"노력을 거듭할수록 데생에서 멀어졌다."
"그림은 지리멸렬해졌다."
졸라는 대중 앞에서 <작품>의 한 구절을 읽었다.
이런 장면을 세잔은 절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클로드는 매우 비참한 심정으로 1주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회의에 빠져 급기야 그림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배반한 연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 같은 것으로, 부정한 연인을 저주하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사흘 동안 혼자서 처절한 투쟁을 벌이던 그는 목요일이 되자 아침 8시부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틀리에의 문을 꽝 닫으며, 스스로가 너 무도 싫어진 나머지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
- 소설 <작품>에서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는 화가였다.
세잔의 고향 집, 거리들, 여자들, 나무들이 그대로 인용되었다.
졸라는 마네 같은, 다른 화가들의 얘기도 많이 나온다고 항변했다. 소설이란 원래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내용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세잔에게 이해를 구하려고 했다.
세잔은 은행가인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을 재산이 있지만, 자기는 팔릴 책을 써야 한다는 처지도 털어놓았다. 그러나 세잔도 이를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쉬운 대목은, 1년 전 세잔이 졸라에게 화가에 대한 책에 대하여 물었을 때, 미리 언질을 주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졸라는 가정부인 잔느와의 사이에게 두 아이를 낳았다. 본 처인 알렉상드린은 아이가 없었다.
알렉상드린은 결국 두 가정을 인정했다.
1898년, 에밀 졸라가 드디어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들었다. 1월 13일 로로르(여명)지에 '나는 고발한다'를 게재했다.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 내려간 졸라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친구 세잔을 볼 생각이 있는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요, 은둔을 좋아하는 분이라서요"
먼발치에서 이 말을 들은 세잔은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뒤돌아 갔다. 세잔이 졸라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졸라의 용기와 헌신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1902년 졸라는 의문의 질식사로 사망하고, 소식을 들은 세잔은 며칠 동안 울었다고 한다.
20세기를 박차고 등장한 야수파 큐비즘, 추상주의 모두에 영향을 준 세잔.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이라 했고, 피카소는 예술가들의 아버지라고 했다.
* 1936, MOMA 'Cubism, abstract Art 전시 미술사조표
1906년 세잔은 죽는 날까지 폭우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작품 7백 점 이상이 전 세계 미술관에 걸려 있다.
* 엑상프로방스에서 폴 세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