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품>
Théodore Géricault(테오토르 제리코)
Le Radeau de la Méduse(메두사호의 뗏목)
1818~19
1880년
세잔은 졸라의 친구 모임에 초대되었다. 한 여성이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침실에 걸어 놓고 싶다고 했다.
제리코는 이 하나의 작품으로 낭만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로 프랑스인들을 나르던 국영 이민선이 조난당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구호선으로 도피한 후, 임시로 만든 뗏목에 149명의 승객들을 싣고서 밧줄로 끌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고 도망쳤다. 승객들은 적도의 태양 아래서 물도 식량도 없이 12일 동안이나 표류하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결국 구조선이 이들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는 오직 15명이었다.
이 그림을 위해 화가는 기자처럼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생존자를 만나 기아에 미쳐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던 무시무시한 체험담들을 직접 들었다. 이러한 특이한 작업 과정이 그림의 세부 묘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서사시적인 드라마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화가의 낭만적인 감수성이었다.
승객들의 긴장되고 비틀린 나체는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투쟁했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내내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그림의 주제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세잔은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지 못했다. 세잔도 제리코의 리얼리즘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세잔이 사물의 재현을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마도 세잔의 이러한 생각이 이런 과격한 행동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림이 조잡하고 서툴더군"
"예전부터 가까이할 친구가 아니었어"
"파리에서 어딜 가든 문전 박대 당하지"
졸라의 친구들과 아내가 세잔을 이렇게 비난했다.
"그래서, 단점을 아니까 친구는 내쫓고, 단점을 모르니 낯선 이는 받아주라고?"
졸라는 세잔을 옹호했다.
졸라의 친구들의 얘기를 함께 들은 졸라의 노모는 슬픔에 숨이 쉴 수 없었다. 세잔과 그녀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세잔과 졸라는 형제이상의 사이였고 그들은 서로의 부모에게도 자식 같은 존재였다.
1885,
졸라는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세잔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세잔이 졸라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그런데 저 책은 뭔가? 화가에 관한 소설을 쓴다던데, 걱정스럽군"
"아직 말하긴 이르네"
졸라가 대답했다.
1886, 파리
소설 <작품>이 발표됐다. 불행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림처럼 묘사한 글이었다.
"노력을 거듭할수록 데생에서 멀어졌다."
"그림은 지리멸렬해졌다."
"난 여전히 18살이에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졸라는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세잔은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