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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콩 Oct 22. 2024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1부. 충격과 부정]



네가 새벽 3시까지 혼자

이케아 서랍장을 조립했다고

자랑스러워했을 때,

솔직히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배송받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는

풀꽃이 인쇄된 러그도, 인어공주 무드등도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어.


더이상 기대가 되지 않더라.


너와 함께 하는 미래가.




D-day

5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9시


안되는 꿈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할 일을 끝낼 때처럼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박원, <노력>, 2016)

 

  언제나처럼 전화를 걸었다. 지난 2036일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평소처럼 피곤한 목소리였다. 새로운 헬스장을 찾고 있다고 했다. 휴대폰 너머로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못 본 지 이주째였고 일주일 만의 통화였다.

  그는 길게 통화를 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들다고 했다. 우리의 통화는 매번 10분 안팎이었다.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녹음해 틀어놓는다면 마치 심야 라디오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목소리가 뛰어나게 좋아서가 아니라, 10분 중 9분 동안 한 목소리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떠들고 그는 조용히 듣다가 맞장구를 치거나 짧은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나는 또다시 열심히 이야기한다. 이게 우리의 패턴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오빠는 별일 없어?’라는 너무 많이 반복된 나머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질문을 던지니 ‘평소랑 똑같지 뭐. 별일 없어.’라는 똑같이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에 한 개 두 개 하는 식으로 지금까지 수천 개에 달하는 돌을 던졌으나 그의 마음은 방탄유리라도 되는지 5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나를 당신 안에 깊숙이 들여보내주었으면, 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으나 늘 속으로 되새겼다. 원래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걸 더 잘 하는 사람이니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애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자. 보통 친구에게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일 영화 보고 뭐 할까? 바쁘다던 회사 일은 잘 마무리됐어?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났는데 나 자취 시작하고 나서는 되게 오랜만이네."

“그러게.”

  무심한 대답에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던 다짐이 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요동쳤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도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어제 만났던 십삼 년 지기 친구 윤햇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기대하면 안 돼? 특별한 관계인데. 다른 누구보다도 의지할 수 있는 사이여야 하는 거잖아.’

  어제 나는 그 친구와 연습을 했다. 내가 ‘그’ 역할을 맡고, 햇살이 ‘나’의 역할을 대신했다. 내가 그처럼 단답을 하면 친구는 이것저것 화젯거리를 바꿔가며 열심히 말을 걸었다. 이렇게 대답하면 저렇게, 저렇게 대답하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좋아, 꼭 활용해 볼게. 역시 내가 대화를 이끄는 스킬이 부족했나 봐. 어떻게 해야 편안하게 속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짧은 시간 동안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드디어 결심하고 입을 뗐다.

“사실 요즘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느낌이야. 카톡 답장도 엄청 늦게 하고. 전에는 전화하면 1초 만에 받았는데 잘 안 받고 다시 걸어주지도 않고. 카톡으로 잘 자라는 인사도 안 하고. 무슨 일 있어?”

“글쎄, 휴대폰을 잘 안 보게 되네.”

“폰을 안 본다고? 나랑 있을 때는 자주 봤잖아. 무슨 일인데? 솔직하게 말해줘.”

“지금 이야기하다가 내일 할 말이 없으면 어떡해.”

“지금 2주 만에 만나는 건데 같이 할 얘기가 없을까 봐 걱정된다고?”

“정말 솔직하게 말해줘?”

“응? 응.......”

  그리고 우리는 무려 1시간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 드디어 갱신되었다. 우리의 연애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더이상 네게 기대가 안 돼. 그래서 나도 노력을 안 하게 돼.”

  넌 무슨 헤어지자는 말을 황금연휴에 하니, 말할까 싶었지만 참았다. 이후에 이어진 말들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분명 그의 목소리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섭섭했던 것, 이해되지 않아 한심하게 느꼈던 모습, 더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지쳐버린 자신의 상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포부. 그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속마음을 차근차근 쏟아낸 뒤 우리의 연애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우리 그만 만나는 게 맞는 것 같아.”

“왜 이렇게 말이 없냐고, 오빠 이야기도 좀 해보라는 그런 이야기에 스트레스 받았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서 최근에 속상해도 여러 번 참았어. 난 더 잘해보자고 이야기 꺼낸 거였어. 더 단단해지자고.”

“우리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 못했던 말들이 뭔데?"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생일 때 제대로 축하받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냥 조금 섭섭했어.”

“그건 정말 미안해. 갑자기 이사도 하게 됐고, 새로운 부서에서 처음 뵙는 선생님들과 함께 일하느라 여러모로 적응이 필요해서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어. 그래도 내가 매년 색다르게 준비하려고 노력해온 거 알잖아.”

"알아. 공부하는 와중에도 내 생일은 잘 챙겨준 거. 근데 우리 만난 지 꽤 오래됐는데 내가 언제까지 너를 기다릴 수 있을까. 기간제로 일하면서 임용 공부한다고 했는데 벌써 상반기가 다 지나갔어. 올해 합격하지 못하면 내년 시험을 또 기다려야 하는데 그럼 근 2년 동안 같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네가 필요할 때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기간제 교사도 육아 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고 대꾸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고민했냐고 물었더니 6개월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럼 그동안 잘해줬던 건 다 뭐였을까. 이사할 때 짐을 날라주고, 식용유와 각종 향신료를 선물해주고, 고기를 사주고, 이동식 선반을 조립해주고, 새로운 집, 새로운 교무실에서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응원해줬는데.

“전에 그랬잖아. 늘 좋을 수는 없다고. 오래 연애하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고. 지금도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갈 수도 있잖아.”

“이제 그러지 않을 것 같아.”

“정말로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건 참 비참한 말이구나. 무슨 정신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잘 모르겠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또르르 흘리는 예쁜 눈물 한 방울은 어디까지나 연출이다. 현실엔 침대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는 못난 모습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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