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연휴라 불렸던
10월 3일 개천절을 시작으로 6일 추석, 9일 한글날까지 계속 빨간날이었다. ('빨간날'은 한 단어로 사전에 올라있어서 띄어쓰지 않는다) 10일이 평일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를 갈 뻔했으나 재량이 있었던 학교 덕분에 그날도 쉬게 되었고 주말까지 합쳐 총 열흘이라는 휴일을 얻었다. 학교는 이걸 가을방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휴일이 시작되니 혹시 손님도 많지 않을까 저어되어 사장님은 나에게 개천절에도 일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올 추석엔 어디 가지 않고 친정엄마를 비롯한 친척가족들이 반대로 우리집으로 오는 거였기 때문에 개천절은 여유가 있었다. 네, 갈게요, 대답을 하고 금요일에도 다부진 마음으로 출근을 했고 생각보다는 조용한 개천절을 카페에서 보냈다. 연휴 첫날인데 왜 손님이 많지 않지, 했던 의문은 다음날 바로 풀렸다. 이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한 이래 가장 바쁜 세 시간을 보낸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 3시간만 일을 한다) 보통은 근처 풀빌라나 펜션의 체크인 시간이 맞추어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는 양상을 보이던 카페인데 이날은 대중이 없었다. 아마 체크인을 하기 위해 이 동네에 온 손님 못지 않게 고향 가족들을 만나러 온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평소와 달리 체크인 시간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손님들이 없다보니 미친 회전율을 보이며 설거지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사장님에게 말한다. 사장님 부자다잉~
손님이 많아 건물주님까지 합세해서 운영을 했고 그 바쁜 모습을 본 나는 더 도와주고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원래 내일 우리집에 오겠다던 서울 가족들이 갑자기 지금 출발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우리집까지는 한 시간 이상 걸리니 조금 도와주다가 집으로 가면 될 거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할 때 사장님이 추석 선물을 챙겨주셨다. 기시감이 들며 작년 추석 때 대화가 떠올랐다.
- 나는 빈손으로 일할 생각만 갖고 왔는데...
- 원래 추석은 사장이 직원에게 선물을 주는 거예요. 직원이 사장에게 주는 게 아니라.
작년에는 커피콩을 선물로 주셔서 이번에도 염치없이 받아들며 '잘 먹을게요~'했는데 먹는 게 아니라 잘 씻는 거라고 했다. 지난 생일에도 씻는 걸 주셨는데 나 혹시 냄새나나...
냄새 얘길 해보자면 하루에 3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카페 부엌인데도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면 몸에서 탄내가 난다. 탄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커피 냄새를 뜻한다. 카페에 손님으로 앉아 있을 땐 그런 냄새가 나질 않는데 아무래도 커피머신 앞에서 일을 하면 그런 냄새가 배나보다. (배이다 X) 그 기계로 만들 줄 아는 거라곤 에스프레소 내리기 밖에 없는데 이거이거 라떼라도 배우면 우유 전 냄새까지 (쩔다 X 절다 O) 합쳐져서 나에게 대단한 냄새가 나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사장님한테는 그런 냄새 안 나는데..? 그렇다고 향수나 핸드크림 따위는 쓰지 않는다. 사장님이 부탁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냥 그렇게 한다. 뭔가 내 화장품 냄새가 커피향에 영향을 끼치게 될까지 그렇다. 내가 가는 카페들도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핸드크림을 바른 손으로 내 컵을 안 만졌으면 좋겠다. 컵에서 핸드크림맛 나니까.
그렇게 연휴 초반 이틀 동안 카페일을 도와주었고 가족들이 집에 도착했다. 이모들까지 모두 다 내 집으로 와서 송편을 만들고 고기를 굽고 과일을 먹었다. 송편은 올해 초에 우리집 마당에서 캔 쑥을 얼렸다가 쑥반죽을 했고 집 뒤에 있는 소나무에서 솔잎을 뜯어다가 씻어서 함께 쪘다. 가족들이 없었으면 쑥이든 솔잎이든 그냥 그렇게 있다가 겨울을 맞았을 텐데 어쩌다보니 자연 재료를 공급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모들은 우리집에서 지내는 3일 내내 온종일 밤을 주웠는데 우리집에서 그렇게 많은 밤을 생산할 줄은 몰랐다. 정작 살고 있는 우리는 그냥 마당에 굴러떨어진 것만 주워서 먹는 수준이었는데 이모들은 달랐다. 진드기가 붙을까봐 들어가지 않는 우거진 곳까지 마구 들어가서 밤을 주워오셨다. 너무 재밌어 너무 재밌어 하시면서. 아 이래서 외부인들이 자꾸 우리집에 올라오는 거였구나 싶었다. 밤을 주우려는 노인들이 봉지를 들고 사유지인 우리집에 침입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CCTV로 보면서 왜 봉지에다가 우리집 돌을 주워가나 했더니 알고보니 그것이 밤이었던 것이다. 숲해설가로 활동하시는 이모는 이것이 산밤이기 때문에 훨씬 맛이 있다고 평소에 어린이들에게 설명하듯이 이야기 해주었고 그밖에 우리집 뒤에 있는 나무가 알고 보니 으름나무였으며 앞에 있는 나무는 고욤나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나는 있어도 안 먹으니까 엄마랑 이모들 다 가져가라고, 놔두면 썩고 벌레만 생긴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본의아니게 또 잊으시고 지금 우리집 냉장고에 가득 있는 송편과 산밤. 풍성한 마음이 저절로 든다. 서울과 런던 등 도시에서만 4n년을 살다가 한국 시골살이를 한 지 1년 반이 된 나와, 시골에서 태어나 살다가 20대부터 서울살이를 시작해 도시에서 산 시간이 시골에서 산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70대 엄마와 이모들인데도 역시 고향의 손길은 어디 가지 않나보다. 내 아이도 그랬으면. 시골에서 지내는 이 시간이 이 아이의 눈과 손을 남다르게 빚을 수 있기를.
어르신들이 도시로 돌아가는 날. 커피를 마시고 가고 싶다 하셔서 시골에서 사귄 친구가 하는 꽃밭이 있는 카페에 데리고 갔다. 사람수대로 음료를 주문하고 사라진 이모들이 넓은 꽃밭을 구경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친구(사장)에게 오더니 칼이 있냐고 물으신다. 아 이모 또 뭐하려고! 저기 고구마순이 버려져 있어서 다듬으려고 하신단다. 아 왜 여기서 버린 고구마순을 다듬어! 소리쳤더니 '니 친구가 버리는 거라고 그래도 된댔어!' 하신다. 아이구야. 너무 풍성하다 풍성해. 근데 보통은 시골 사는 이모네에 조카가 놀러가는 그림 아닌가? 괜스레 남들과 영원히 다른 방향으로 사는 내가 우스워 미소가 지어졌다.
빨간날「명사」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날이라는 뜻으로, ‘공휴일’을 달리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