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지현 Oct 19. 2024

적임자

3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팀장 거절기는 단골 술안주가 되곤 했다. 요즘 시대에 나이 많고 연차 높다고 팀장 시키는 그런 고루한 조직이 어딨냐며, 나이 연차 상관없이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팀장되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는 팔자에도 없는 MZ 마인드를 마음껏 드러내곤 했다.


“나이순, 연차순 대신 정말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시켰으면 좋겠어”


아직 머리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은 나 대신 팀장이라는 직책을 더 훌륭히,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정녕 그런 사람을 찾는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나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침내 우리 팀에도 새로운 팀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새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한게 많지만 빠르게 적응하고 팀을 안정화시킬 수 있도록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나와 나이가 동갑인 팀장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이미 다른 조직에서 팀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팀과의 첫 상견례 자리에서 그는는 팀원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감있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팀장 제안에 사색이 되어 두 손을 휘휘 젓고 온몸으로 거부했던 나와는 다르게, 그는 꽤나 외유내강형의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드디어 팀장이라는 직책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은 것일까? 앞으로 그가 이끌 우리 팀은 어떻게 달라질까? 기대되는 마음 반, 한편으로 걱정되는 마음도 반이 들었다. 여기서의 걱정은 또 다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리더가 이끌 팀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잠깐 뒤로 숨길 참이었다. 지금은 걱정과 부담보다는, 새로 온 팀장님이 잘 적응하고, 우리 팀을 잘 이끌 수 있도록 내가 도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어떻게 보면 나 대신 힘든 결정으로 이 팀에 새로 온 분이었다. 나는 팀원으로써 새로운 팀장님을 잘 서포트 할 나름의 책임이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책임감을 부여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지현님, 당분간은 제가 팀 업무 파악하느라 지현님께 많이 물어보면서 일할 것 같은데 귀찮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빠르게 적응해서 팀원분들이 만든 성과가 더 빛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

“제가 당연히 서포트해야죠.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주세요.”


그와의 첫 일대일 면담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서포트하겠다는 나의 진심어린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였다. 사실 나는 나대로 걱정스러웠다. 그와 내가 동갑이라 나를 팀원으로 여기는게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걱정은 기우였는지, 그는 나를 팀원이자 조언자로 적극 활용하며 팀의 업무를 빠르게 파악하고, 정리하고, 단숨에 이끌었다. 


“문제 상황 이해했어요.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프로세스 만들어서 윗선에서 정리될 수 있게 할게요.”

“이 회의는 불필요해보이니 앞으로는 서면으로 대체하는거 어때요?”

“회의 포맷을 수정했습니다. 불필요한 작업은 줄이고 전주 개인별 업무의 성과와 인사이트, 개선사항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변경했으니 다들 참고해주세요."

“향후 팀 내 R&R(역할과 책임을 뜻하는 Roles and Responsibilities-의 줄임말, 주로 팀 내 개인별 업무 분장시 활용되는 표현)은 이렇게 가져가보려고 합니다. 다들 보시고 의견 부탁드려요”


우리 팀으로 부임한지 2주만에 그는 새로운 팀장으로서 무서운 속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팀이 현재 처한 문제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것을 넘어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개선 방법을 찾고, 팀장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적극적으로 해소해주었다. 새로 와서 적응이 어려우면 어떡하지, 업무가 잘 이해가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팀에 온 것을 후회하면 어떡하지, 혼자 어림짐작하며 걱정했던 것이 민망하고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잠깐의 팀장 공백으로 산적해있던 업무량을 소화하느라 매일 야근의 야근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끄떡없어 보였다. 오히려 새로운 팀을 적응하고, 새로운 업무를 파악하고 공부하는 이 과정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한마디로 적임자였다. 우리 모두가 찾고, 그중 내가 제일 간절하게 찾던 팀장 적임자말이다. 그가 우리팀으로 와서 업무 적응하고 일하는 2주의 기간동안 남모르게 그를 관찰하며 감탄하면서도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우리 팀에 와줘서 너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내가 잘할 자신이 없었던 일을 훌륭히 멋지게 수행하는 그의 능력이 부러웠다. 내가 만약 팀장이었다면 저렇게 똑부러지게 잘할 수 있었을까? 팀원의 일원으로 그간 관성적으로 해왔던 업무들을 부임한 지 2주만에 개선 포인트를 발견하고 이끌어내는 그의 눈썰미가 부러웠다. 방황중이었던 팀을 순식간에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도록 이끈 그의 리더십도 부러웠다. 특히 이 모든 과정을 스트레스 대신 즐기며 일하는 그의 여유있는 태도가 부러웠다. 모두 나에게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 저런 부분은 나도 배워야겠어.'


누군가의 좋은 포인트는 적극적으로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앞으로 팀원의 입장에서 그를 열심히 서포트하면서, 그의 장점도 열심히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면서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걸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또 다시 리더 제안이 왔을 때,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업무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준비된 사람으로 성장했길 바랐다. 지금보다 내 능력치가 한껏 레벨업 되어 일하느라 내 인생을 뒷전으로 두지도 않고, 허덕이며 일하지도 않고, 일도 인생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길 바랐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리더 제안이 다시 오지 않는게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이전 17화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