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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지현 Oct 20. 2024

성적표

3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저 어제도 날밤샜어요. 걱정돼서 잠이 안오더라구요.”

“우리 지현님 어떡할거야 진짜. 저희 대박날거에요.”

“그래야 하는데…”


새롭게 맡게 된 신제품의 런칭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사 차원에서 관심을 갖는 프로젝트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도 투입되고 있었다. 나는 이 신제품 런칭의 마케팅 담당자였다. 사실 신제품 런칭의 경우 특히나 마케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제품의 홍보, 프로모션 혜택  등 마케팅 담당자가 신경써야할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모션은 런칭 초반의 매출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초기 매출의 성적표에 따라 향후 우리 플랫폼에서 이 제품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간고사 성적표가 좋아야 추후에도 계속적인 마케팅 지원이 이어질 수 있다. 그 말인 즉 마케터의 부담감도 말도 못하게 크다는 것을 뜻한다. 


덕분에 나도 런칭일이 코앞으로 다가올 수록 제대로 잠을 못자는 날이 많아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는데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밤새 나를 괴롭혔다. 런칭이 예정된 주차부터는 매일 자정 넘어 퇴근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퇴근시간이 늦어질 수록 잠자는 시간도 덩달아 늦어지고 있었다. “잘될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나를 불면의 세계로 유도했다.


“저 지금 4일째 잠 못자고 있음요.”

“저도 오늘 악몽꿨어요 크크"

“오늘은 잘 수 있겠죠? 자정부터 오픈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다행인건 신제품에 대한 기대 수요도 시장에 어느정도 형성된 것 같고, 저희 혜택도 좋으니 잘 나올 거예요.”


매일 담당 MD와 서로의 불면 상태를 체크하며 “나 오늘도 잠 못잤다”, “나도 악몽꿨다”를 호소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드디어 고지가 코앞이었다. 오늘 밤부터 신제품 판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험 성적이 100점이건 0점이건 어쨌든 시험을 보면 끝은 나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시험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시험 과목은 마케팅…내가 그간 준비했던 마케팅이 100점일지, 0점일지 이제 곧 성적표를 받게 된다.


사실 할인을 많이 하면 할 수록 매출은 잘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사는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니, 항상 적정 수준의 혜택을 얼만큼 제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마케터는 언제나 눈치싸움을 한다. 투입 비용 대비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매출은 어느정도인지 머리 싸움하고, 경쟁사는 어느 정도의 비용을 투입하는지 염탐하며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혜택을 잘 꾸린다 하더라도 고객이 모르면 매출은 나올 수 없다. 충분한 홍보를 통해 고객에게 “우리 이렇게 좋은 혜택을 준비하고 있어요”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도 제품력이 별로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에 제품력이 받쳐줘야 하는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좋은 마케팅 성과는 이 모든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케팅이란 시험이 참 어렵다. 시험지를 제출하자마자 고객은 부리나케 채점을 하고, 마케터의 성적표는 그 순간 바로 출력된다.


그렇게 지금, 나의 성적표도 출력되고 있었다. 


“지금 저희 매출 나오고 있는거 맞죠?”

“네! 맞아요. 지현님! 우리 오늘 발뻗고 잘 수 있어요!”

“와…. 저희 홍보가 잘 되었나봐요. 다들 찾아와서 주문하고 있네. 저 지금 좀 감동이에요.”

“저희가 준비한 상품 구성이랑 프로모션 혜택도 고객한테 어필된 것 같아요. 진짜 고생했어요. 우리 다!”


다행히 제품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하나, 둘씩 들어오던 주문이 연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몇 달간 골머리를 앓으며 준비했던 프로젝트이자 나의 마케팅 성적표가 다행히 좋은 점수를 받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드디어 불면의 밤을 종료하고 발뻗고 잠을 잘 수 있어 보였다. 


“지현님 요즘 고생했는데 대박났네요! 너무 잘됐다.”

“기대보다 매출이 잘 나와서 너무 다행이에요. 망할까봐 걱정했는데…”

“아니에요. 지현님 고생했는데 잘될 수밖에 없었음!”


다행히 이 회사로 이직하여 맡았던 업무 중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좋은 성과로 마무리 지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의미있는 성과로 평가되었고, 덕분에 여기 저기에서 고생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라는 칭찬도 많이 듣게 되었다. 


솔직히 직장생활 9년만에 처음으로 마케팅이란 시험과목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근 10년간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내가 잘 만들어서 좋은 성과를 냈다고 자랑할 만한 결과치가 딱히 없었다. 10년간 같은 일하면 어떤 한 분야에서 장인이 된다는데, 내가 스스로를 ‘마케팅 장인’이라 칭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난 마케터였지만, 먹고 살기 위해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회사원에 가까웠지 냉정하게 스스로가 능력있는 마케터는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내가 내 손으로 ‘성공 경험’을 만들게 된 기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래서 망하면 책임을 피할 길도 없어 두려워 날밤새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날밤새고 고생한 덕분에 처음으로 “이건 내꺼다”라고 말할 수 있는 좋은 성과를 만들게 되어 참 기뻤다. 매일 일찍 퇴근하는 것만 기다리던 하루살이 직장인이 10년만에 처음으로 일을 통해 뿌듯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책에서 숱하게 보던 워커홀릭 인들의 “일을 통한 기쁨”이 이런 것일까? 아무튼 회사다니며 처음 느껴본 이 생소한 뿌듯함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기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또 다시 매일같이 자정넘어 퇴근하고, 날밤새는 날들이 이어져도 괜찮냐 물어보면 내 대답은 단박에 “아니오”가 나오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 새로운 즐거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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