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어느새 12월, 한 해도 벌써 다 끝나간다. 올해가 끝난단 의미는, 내가 이 회사에 이직한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단 뜻이기도 하다. 나에게 이번 1년은 참 길고도 빨랐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던 하루 하루가 길고 지난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도 이제는 1인분의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매일 야근의 야근이 이어지면서부터는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아채기도 어려울 정도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와중에 팀장을 하니 마니로 감정소모 했던 시간까지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한 해가 지나가는 기념을 구실로, 오늘은 마케팅실 송년회가 있는 날이었다. 퇴근 후 오늘의 회식 장소인 고깃집에 갔다. 이미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중이었다. 나도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대화에 동참했다. 그간 오며가며 인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래도 같은 팀이 아닌 이상 이렇게 서로 마주하며 대화할 기회는 없었다. 다들 조금의 어색함과 낯가림은 숨긴 채 서로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마케팅실 워라밸 파탄난거 어떡할거야 진짜."
"그니까요. 마케팅실 사람들은 다들 퇴근을 안해!"
술이 조금씩 들어가며 다들 그간 쌓아왔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냈는데, 그중 최고는 마케팅실 야근에 대한 개탄이었다. 사람 사는거 다 똑같다. 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길래 나만 일하기 싫어하는줄 알았더니 그냥 다들 티를 안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한다. 매번 일 이야기만 하던 사람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몰랐던 점을 알 수 있다. 회식을 선호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송년회 덕분에 ‘나만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다’며 슬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나도 한마디씩 거들며 하소연을 하고 있었던 그때, 나와 평소 대화를 거의 해보지 않았던 다른 팀 유진님이 내가 있는 테이블로 찾아오셨다.
“저 지현님이랑 꼭 대화하고 싶었어요.”
“오 정말요? 유진님 여기 앉아요!”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내가 있는 테이블로 찾아왔다. 나와 꼭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은 고마우면서 낯설었다. 나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인간 관계를 맺는 스타일이었지, 먼저 대화를 주도하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간 업무적으로 전혀 접점이 없었던, 그저 얼굴만 알고 가볍게 인사만 하던 분이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일부러 찾아오다니, 생소하면서도 고마운 관심이었다.
“지금 지현님 팀장님 오시기 전에, 왠지 지현님한테 팀장 제안이 가지 않았을까 싶어서 저 혼자 걱정했거든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 아무한테도 말 안했었는데?”
“저도 똑같은 경험이 있거든요. 지현님 거절한 거죠? 잘했어요. 아무도 지현님한테 잘했다고 이야기 해주는 사람 없었을 것 같아서 오지랖이지만 제가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공감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나 혼자 남 몰래 끙끙 앓아왔던 고민을 말이다. 이 회사에서 내 상황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자칫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나 혼자 속앓이만 했던 그런 고민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나를 지켜보며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너무 고맙고 따뜻한 위로에 나의 마음의 장벽도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저는 아무도 제 생각을 공감해줄 수는 없을거라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팀장이 얼마나 어려운건데요. 쉽게 결정할 수 없어요. 내가 못하면 팀 전체가 힘들어지는 것이 잖아요. 물리적으로 힘들어지는건 당연하고… 저도 그래서 못한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알고 보니 나와 비슷한 연차, 비슷한 나이였던 유진님도 나처럼 팀장 제안을 받은 적이 있고 고민 끝에 거절한 경험이 있었다. 유진님은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었다. 본인보다 팀이 걱정되어 팀장 제안을 쉽게 수락할 수 없었다고 했다. 본인이 팀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업무 역량이 아직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당장은 할 수 없어서 거절했지만, 저도 제 역량을 올려야겠다 싶더라구요.”
“유진님 멋지네요.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했거든요.”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계속 다니려면 어쩔 수 없는거죠. 저도 이런 이야기 다른 사람한테 꺼내놓기 힘들었는데, 뭔가 지현님이 저랑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싶어서 무작정 오늘 찾아왔어요.”
“저 오늘 진짜 너무 위로가 됐어요.”
오늘 송년회가 아니었다면 회사에서 나를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역시, 회식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대화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단 것을 느낀다. 오늘 송별회 덕분에 나는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지 몰랐다. 그간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니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온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주신 동료 덕분에 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간 나를 괴롭혔던 불안, 걱정, 자책감을 하나 둘씩 털어놓았다.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할까 싶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마음 속 깊이 숨겨놨던 응어리를 말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남의 시선 상관없이 오롯이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희 나중에 따로 밥 한 번 먹는거 어때요?”
“밥 말고 술마셔야 해요. 저희 조만간 술마셔요.”
새벽 1시 2시가 지나도록 끊이지 않던 대화는 결국 다음의 만남까지 기약하였다. 처음으로 숨김없이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고마운 인연을 만들었다. 송년회의 새벽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새해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해가 바뀐다고 달라지는건 없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고민을 하고, 힘들어하며 속상해하고 스트레스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몰라서 남몰래 나머지 공부를 하던 업무 꼴찌가 이제는 1인분의 몫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끙끙 앓고 있던 나에게 이제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도 생겼다. 시간은 흐르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나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내년의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할까? 불안과 걱정보다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내년의 나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