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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탁자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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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Sep 19. 2023

탁자 (10)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작품

사료를 한 바가지 퍼서 담 위에 뿌린 노파는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개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사료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골목 안을 채웠다. 사료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끊임없이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바가지는 깨져 있었다. 노파에게는 깨진 바가지도 쓸모가 있는 걸까. 순간 담 위에서 빈 병 몇 개가 쏟아졌다.

  “여기서 십 년도 넘게 살았어. 고작 며칠도 안 된 네가, 네까짓 게 뭔데?”

  노파가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온몸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듯했다. 이참에 노인을 처벌할 수도 있을지 몰랐다. 노파가 멈칫하는 순간 그림자가 노파를 밀쳐냈다. 노파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림자는 노파를 덮쳐 뺨을 후려갈겼다. 바가지를 휘두르던 노파는 겨우 그림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림자가 헛기침을 내뱉는 사이 노파는 자세를 고쳐 잡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그림자는 가로등 아래로 밀려났다. 그제야 공영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에는 그동안 버려 둔 표정이 한꺼번에 드러나 뒤범벅된 듯 이글거렸다. 말려 볼 틈도 없이 공영은 노파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노파가 재빠르게 비켜서는 바람에 공영은 담에 부딪혔다. 때마침 개들이 일제히 짖어 댔고 부탄가스 통이 우르르 쏟아졌다. 돌아선 공영은 노파의 머리를 움켜쥐고 주먹을 휘둘렀다. 집 안을 비워 낼 때마다 쥐던 주먹과 열심히 자려고 쥐던 주먹이 겹쳤다. 딱히 어디를 노리고 날리는 것 같진 않았다. 개 짖는 소리처럼 두서없이 올려붙였다. 대개 빗나갔지만 한 번은 노파가 “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공영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제발 좀! 사람이면 사람답게! 응?” 

  시간을 두고 숨을 고르더니 다시 노파를 옥죄었다. 천천히 주변을 휘둘러보던 공영은 내 쪽을 노려봤다. 험악한 얼굴이 사방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사람답게 좀 살아야… 할 거 아냐! 이젠 개를, 개까지! 끌어들일 작정이야? 어?”

  어느새 빌라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골목을 둘러쌌다. 몇몇이 달려들어 겨우 공영과 노파는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은 자리라 공영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고르지 않은 호흡만 근처를 서성거렸다.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물러나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대체 왜 야밤에 개를 건드려서 이 난리예요?”

  여전히 마땅한 대답을 떠오르지 않았다. 개라도 실컷 짖어 줬으면 했다. 이럴 바엔 개에게 물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노파는 한쪽에서 사다리를 끌고 와 담을 타 넘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한껏 들떠 보였다. 예전에 들었던 콧노래도 이어졌다. 이제야 어떤 노래였는지 깨달았다. 동요인 줄 알았는데 언젠가 캠페인에서 쓰였던 노래였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괴한 멜로디와 가사에 담긴 차별과 비하의 의미가 논란이 되면서 사라진 캠페인이었다. 노래는 가사만 바꾼 채 다른 캠페인에서 쓰여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떠나고 개들도 틈을 찾아 파고들자 골목 전체가 고즈넉하게 가라앉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봐도 공영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 끝에 시계가 잡혔다. 늘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가 이번만큼은 거의 정확하게 맞았다. 

  그날에야 빌라 사람 중 몇몇은 누군가 새로 이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눈치도 없는 데다가 이기적이기까지 한, 규칙을 익히려면 꽤 애먹을 듯한, 소용없는 민원을 넣어 담당자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그들은 쓰레기 집을 발음할 때 목소리에 힘을 주지도 미간을 좁히지도 않았다. 그건 나를 향했다. 골목을 들쑤셔 놓은 건 노파가 아니라 나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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