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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탁자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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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Sep 19. 2023

탁자 (11)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작품

 주방을 둘러보던 공영은 내가 챙겨 온 칼을 손에 쥐었다. 무른 사과를 썰어도 엇나가고 미끄러지기 일쑤인 칼이었다. 칼에는 무뎌지기까지의 시간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내 방에 처음 왔던 날 공영이 괜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베인 상처까지. 어쩌면 노파도 칼에 대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몰랐다.

  공영의 짐은 트렁크 하나로 충분했다. 

  “거봐, 트렁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니까.”

  공영이 숨을 몰아쉬자 금세 움츠러들었다. 매서운 숨소리가 머리채를 휘감아 낚아채고 바닥에 내다 꽂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공연히 주눅 든 채 공영과 거리를 두고 앉았다. 눈치채지 못하게 한 뼘, 거기에 한 뼘 더. 거리를 늘여 가다 보니 짐작보다 멀찌감치 떨어졌다. 공영도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물러났기 때문이다. 공영이 있는 자리에서는 내게 손대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공영과 노파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서로 뒤엉켜 나뒹굴었던 건 순식간이었다. 뜯어말리거나 그만두라고 소리 지를 새도 없었다. 공영은 자세를 바꾸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든 내게 덤벼들어 뺨을 후려갈길 것 같았다. 이어서 맹렬하게 짖는 개 떼처럼 고함을 내지를 것이었다. 노파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발 사람답게 좀 살라고. 

  공영이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무던한 데다 둔한 사람처럼 두고만 봤다면. 노파가 나를 위협하고 집어던지든 말든 가만히 두고 봤던 쪽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저 뭐 하는 거냐고 야멸차게 쏘아붙이기만 하는 건 어땠을까. 최소한 노파를 슬쩍 밀쳐내는 정도만 됐어도 많은 것들이 다를 듯했다. 공영이 날린 주먹이 위험한 순간에 놓인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것인지 헷갈렸다.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도.

  공영이 발끝에 거치적거리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는 상자만큼 자리가 남았다. 장판 무늬가 드러나자 그 사이로 무언가 줄줄 새 나가는 것 같았다. 팔을 뻗어 겨우 잡아챘다. 순간 공영은 거친 손길로 빼앗아 한쪽으로 내던졌다. 상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반대쪽이었다. 그리고 공영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방 안에 빈자리가 없었다면 애초에 서로 떨어질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내놓는 게 아니었다. 정리한답시고 하나둘 빼내기 시작하니 결국 공영마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모든 걸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놔야 했다. 그럼 예전으로 돌아가 흐트러지지 않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선 탁자부터. 탁자를 찾아와야 했다. 모든 일은 탁자를 포기하고 들어냈을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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