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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탁자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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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Sep 19. 2023

탁자 (12)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작품

 어느새 노파의 쓰레기는 골목을 건너 빌라 주차장 뒤쪽까지 침범했다. 휘어진 바퀴나 우그러진 양동이가 야금야금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어디까지가 노파의 집인지 헛갈렸다. 대문에 걸려 있던 시계는 시계라고 부르기 망설여질 정도로 부수어졌다. 시침과 분침은 구부러졌고 숫자는 제멋대로 뒤섞였다. 10에서 떨어져 나왔을 0 아래 비딱하게 세워진 사다리는 엉성했다. 오를 때마다 비명처럼 삐거덕거렸다. 멈춰 서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서둘렀다. 고작 야트막한 담을 오르는 것뿐인데도 금세 땀이 맺혔다. 

  담 끝에 올라서자 광활한 쓰레기 더미가 볼썽사납게 드러났다. 개들은 제자리를 맴돌다가 깊숙이 파고들어 머리만 내밀었다. 맹렬하게 짖어 대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개들 뒤로 탁자가 보였다. 몇 발짝 내딛지 않아 손만 뻗으면 잡힐 듯했다.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개들이 한꺼번에 짖었지만 발을 구르기만 할 뿐 달려들진 않았다. 그사이 뒤에서 공영의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렴풋이 공영의 표정이 드러났다. 탁자에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면서 드러냈던, 어쩌면 칼이 서른 자루쯤 되었다고 할 때 놓쳤던 표정.

  우리는 이때껏 노파의 집이 함정인 줄 알았지만 그동안 함정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돌아서서 걸음을 이어 갔다. 쓰레기 더미는 견고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무릎에 백과사전 모서리와 화분이 닿았다. 걸음마다 질감이 달라졌다. 얼음판 위를 딛는 것처럼 차고 미끄러웠고 반죽을 밟고 있는 것처럼 질척거리기도 했다. 깊이도 달라 고작 발목까지 빠지다가 삽시간에 허벅지 절반이 뒤덮였다. 노파가 어떻게 사뿐사뿐 걸어 다닌 건지 알 수 없었다.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계속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린 것만 같았다. 타이어 위를 밟고 올라서서 겨우 몸을 틀었다. 공영이 또렷하게 보였다. 연신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손을 들고 힘껏 흔들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소리를 질러 봐도 개 짖는 소리에 묻혔다. 공영은 쓰레기 더미에서 끝내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쓰레기라니. 다 쓸모가 있지. 

  노파라면 내 쓸모도 하나쯤 찾아 줄까. 그때 누군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의식처럼 경건하게. 삽시간에 한쪽이 무너지면서 몸이 기울었다. 걸음을 떼자 위에서 무언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탁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반대편에 쌓아 두었던 물건들도 균형을 잃었다. 쓰러질 듯 되똥대다가 결국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디로든 피해야 했다. 급히 휘둘러보니 시선 끝에 틈이 보였다. 쓰레기 사이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줄 알았던 노파가 드나들던 통로 같았다. 그 끝에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시선이 이내 틀어졌다. 균형을 잃은 탓이었다. 재빨리 틈을 파고들었다. 허공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 하는 소리에 사방이 캄캄해졌다. 아무래도 탁자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쩐지 오늘 밤은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지 않고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끝>     


* 저장장애와 관련된 내용은 유성진,『저장장애』학지사, 2017. 랜디 O. 프로스트·게일 스테키티 지음,『잡동사니의 역습』, 정병선 옮김, 윌북, 2011.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임상심리학 전공 현혜민,「저장 성향과 강박 신념, 우유부단성, 심리적 안녕감과의 관계」, 2014. 2. 창원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석지수,「일상 사물을 통한 분리불안에 관한 연구」, 2019. 2.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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