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이란전쟁 10화

[이란전쟁] CIA의 눈에 MBS는 왜 양날의 칼인가?

- 1) 대이란 강경책의 선봉에 서면서 미국의 환심을 산 왕자

by 김창익

무하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CIA의 주목을 끈 것은 2015 예멘 공습 당시다. 당시 무하마드 빈 살만은 31의 젊은 나이로 부왕세자이면서 국방장관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예멘 후티 반군에 대해 사우디가 적극적인 공격에 나선 것을 3세대 왕자간의 왕권경쟁의 틀에서 분석했다. 무하마드 부왕세자가 왕세자인 사촌형 무하마드 빈 나예프를 경쟁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왕위가 형제세습되는 국가다.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에겐 36명의 아들이 있는 데 현 국왕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왕이 2세대 왕 중 다섯번째, 사우디 역사상 6번째 왕이다.


살만 왕은 2015년 집권직후 야망을 가진 자신의 아들 무하마드 빈 살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공작을 발

빠르게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직후 이복 동생인 무크린을 왕세자로 지목했다. 동시에 전 국왕의 사람들을 추출, 쿠데타의 싹을 잘랐다. 이후 250여명에 달하는 3세대 왕자들 중 친형의 아들이자 조카인 무크린을 부왕세자로 지목하면서 3세대 세습의 초석을 닦았다. 동시에 당시 리야드와 메카 주지사였던 전 국왕의 아들들을 해임했다.


이를 수다이리 세븐의 주도권 강화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수다이리 세븐은 압둘아지즈 초대 왕이 가장 총애했던 수다이리 왕비의 아들들로 살만 국왕을 포함해 다섯명의 아들이 돌아가며 왕을 했다. 사우디 왕가의 가장 파워풀한 패밀리로 보면 된다. 살만 왕이 수다이리 세븐의 권력 강화를 위해 무크린을 3세대 중 첫 왕세자로 내세운 건 자신의 아들을 내세울 경우 수다이리 세븐간의 반목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사우디 왕가 가계도


하지만 야심과 배짱, 비정함을 지닌 무하마드 빈 살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촌형에게 왕좌를 내주고. 자신이 차기 왕세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아파 후티 반군 공습을 주도한 무하마드 빈 살만 왕자는 미국의 눈엔 단박에 시아파 맹주인 이란을 견제할 적자로 부상한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인 에멘 공습의 배후로 미국이 지목됐는데, CIA의 눈에 무하마드 빈 나예프보다는 무하마드 빈 살만이 차기 국왕으로 더 적합해 보였을 것이다.


2017년 살만 국왕은 조카 무하마드를 왕세자에서 폐하고, 친아들 무하마드를 왕세자로 봉하면서 무하마드 빈 살만이 250여명의 왕자중 초대 3세대 국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무하바드 빈 살만은 올해 3월 빈 나예프를 역모혐의로 체포했다.


이를 둘러싸고 한 때 왕족 내 쿠데타 설이 돌았다. 살만왕의 유일하게 남은 동복형제인 아흐메드와 빈 나예프(무하마드이나 비 살만과 이름이 같아 빈 나예프로 표기)간에 조카이자 사촌동생인 빈 살만의 왕위계승을 막기 위한 모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아흐메드와 빈 나예프는 왕실충성위원회를 통해 빈 살만을 왕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2007년 설립된 왕실충성위원회는 사우디 왕가의 평화적인 왕권 이양을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로 빈 살만이 빈 나예프를 끌어내리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이 위원회의 결정이다. 34명의 위원중 빈 나예프를 끌어내리는 것에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흐메드다. 두 사람은 가택연금중이다.


세자 책봉후 빈 살만은 일관되게 대 이란 강경책을 펼치며 미국의 대중동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 사우디는 국내 시아파 성직자 47명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처형했다. 이에 이란이 발발하며 테헤란 소재 사우디 대사관에 테러를 감행하자 빈 살만 왕세자는 이란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이란 외교관을 추방했다.






keyword
이전 09화[이란전쟁] 파키스탄은 왜 미중전쟁의 화약고가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