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땅의 고수가 되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용하던 샤워기가 댕그랑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필이면 이때. 줄이 빠졌구나 생각하고 어떻게든 내 손으로 끼워 보려고 샤워기를 들여다보며 애를 쓴다. 그냥 속 들어가 끼워지기만 하면 될 텐데 잘 끼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해결할 수가 없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바가지로 쓸만한 걸 찾아봐도 조용히 쓸만한 물건도 없다. 씻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스텐 양재기로 물을 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세면대에 부딪치는 그 소리 듣는 게 고역이다.
바가지를 구하려 동네 마트를 다 돌아보아도 옛날처럼 부드럽고 쓰기 좋은 그런 바가지는 안 보인다. 어쩔까 생각하다가 남편에게 올 때 바가지 두 개만 사 오라고 부탁했다. 옛날 스타일 바가지는 시골장에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바가지 두 개를 사놨다고 한다. 며칠만 더 달그락거리며 기다리면 될 것 같다. 남편을 기다리는 건지? 바가지를 기다리는 건지?
혼자 끙끙거리며 애써봐도 해결할 수 없었던 샤워기를 남편의 손이 가니 잠시 사이에 신문물로 태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드럽게 흐르는 따뜻한 물. 일정한 온도의 이 뜨거운 열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을 맘껏 뒤집어쓸 수 있다는 이 행복. 불편함 뒤에 찾아온 이 편리함은 눈물 나게 고맙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 느낌은 하루의 피로를 싹 씻어준다.
고맙고 감사한 이 마음이 꼭 샤워기의 뜨거운 물과 편리함 때문일까. 함께 살아도 아직도 남의 편 같았던 남편이 오늘만은 내 편이 되어 준 날이라 감동이 더 크다. 이 사람이 진정 내 편이었던가 더 고맙고 더 사랑스럽다. 늘 곁에서 불편함 없이 해결해 줄 땐 당연한 줄 알다가 어긋나면 야속하고 멀어지면 아쉬움이 더 깊어지니 고마움도 더 크게 다가온다.
도심에서 구하지 못한 귀한 바가지를 두 개나 받았으니 바가지 부자다. 이 바가지는 또 할 일이 없어졌으니 뭐 하지. 바가지 사 오라고 하기 전에 ‘서방님, 당신이 보고 싶어요. 빨리 오세요. ’ 그랬으면 더 좋았을 걸. 밀땅의 고수가 아니라 바가지만 찾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