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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Jun 21. 2024

그날이 오고 있다

오기 발동하면 할 수 있는 일

여름 동안 잘 썼던 선풍기를 다음 해를 위해서 깨끗하게 씻어 두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녀. “그냥 둬 내년에 쓸 때 씻지 뭐” 그냥 두라는 남자. 그냥 둘 수도 있지만 일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일을 기억하느냐. 어차피 할 일인데, 또 한편 내일일은 난 몰라요. 내 날이란 보장이 없으니까 오늘만 잘살면 될 텐데 일 년 후까지 생각하는 것은 중병일까.


일 년이 뭐 그렇게도 빠른지 선풍기 바람이라도 있어야 살 것 같은 더위가 찾아왔다. 벌써 여름이다. 급한 마음에 여름맞이 준비도 안된 선풍기를 앞에 놓고 틀까 말까. 후딱 씻으면 될 일인데 어떻게 해체하는지 몰라서 선풍기가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안전망과 날개에 먼지가 야무지게 착 달라붙어있다.


이럴 때를 위하여 미리미리 해두면 어때서 구시렁거리며 오래 들여다보면 선풍기 목이라도 부러뜨릴 것 같다. 치우자 구석으로 밀어버릴까 우선 급하니 먼지바람이라도 쐐볼까. 그냥 되는대로 살자 여러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코드를 꽂아 보자. 한바탕 휘이잉 먼지바람을 일으킨다. 마음은 찝찝하지만 그래도 바람은 시원하다.


선풍기 어떻게 해체하는지 몰라서 씻지도 못하고 그냥 먼지바람을 쐤다고 말한 그녀는 뭘 기대했을까.

‘그랬어 내가 선풍기 씻어줄까?’ 했으면 최고의 대답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묻기라도 하던가. 무슨 뜻인지 알아챘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귓등으로 듣고 넘겨 버리는 남자. 눈치 없는 남자는 콕 찍어서 요거는 된장이고요 이것은 똥이에요. 해야만 알아듣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남자와 한 단계 두 단계 그 뒤에까지 생각하는 그녀는 티격태격하며 어떻게든 살아간다.


바람에 휘날리는 먼지를 생각하면 찝찝하고 날개에 나풀거리는 솜털 먼지가 예쁠 리 없다. 먼지를 먹든가 말든가 마음을 비우자. 며칠 동안 깨끗한 바람인지 먼지바람인지 선풍기에 에어컨을 안고 살더니 더워서 못살겠다고 시골로 훌훌 떠나가버리는 남자. 무너지는 여자 마음은 모르면서 폭우에 멀쩡한 집 무너질까 염려가 많은 남자. 단순한 남자가 미로 찾기 같은 여자의 마음을 잘 읽을 줄 안다면 사랑받을 만하다.


바깥일도 중요하고 나라를 구하는 큰일도 중요하지만 가정에도 소소하게 챙길일이 많다는 걸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바깥일 편하게 잘할 수 있으려면 가정이 편해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집에서 피곤하고 힘든 몸을 편히 쉴 수 있다면 누군가는 불편함 없도록 일을 해주기 때문이다. 안이나 밖이나 힘들지 않고 되는 일은 없지만 표 나지 않는 집안일 하는 것보다 사회활동 경제활동 하는 것이 힘들어도 훨씬 생색나지 않을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다가 갑자기 재빠르게 뒤돌아선다.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옛말이 생각나  받은 그녀는 또다시 선풍기를 앞에 놓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하나의 원으로  테두리도 어딘가는 이음새가 있겠지. 그냥 끼워졌다면 부서지더라도 벗겨보고 끝장  태세다. 가만히 보니  아래쪽에 마무리 지점이 있다. 쉽게 풀어지던 옛날 것에 익숙한 고정관념 때문에 숨겨진 듯한 그곳을  봤던 것이다.


진도가 나가려면 십자드라이버가 필요하다. 요렇게 작은 꼬마 드라이버가 있기나 할까. 드라이버가 있는지 없는지 공구담당이 아니라 깜깜하다. 재봉틀 공구 중에 아주 작은 일자 드라이버를 사용해 볼 참이다. 한쪽 귀퉁이라도 끼워서 돌려 본다. 살짝살짝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하면 뭔가 될 것 같다.


낑낑거리며 어렵게 나사못을 풀고 원통 띠를 벗겨낸다. 먼지투성이가 된 선풍기 철망과 날개를 분리하여 사이사이 속 시원하게 때를 씻고 샤워를 시킨다. 말없는 선풍기도 얼마나 찝찝했을까. 생글생글한 선풍기가 예쁘다. 선풍기 바람 없어도 묵은 때 목욕한 기분만으로도 시원하다. 오기 발동하고 독기가 충전되면 못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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