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망울이 맑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름다워? 이야기 잘해? 솔직한 대답은 아니요.
이야기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않으면서 그런데 왜? 1,000명을 뽑는다니 천 명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
후다닥 우체국에서 등기우편으로 지원서를 발송한 후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과 만날 꿈을 꾼다. 면접 날이 정신없이 지나갔으면 좋을 텐데. 한 달이란 여유를 주니 그 많은 시간이 부담스럽다.
면접 대상자 4,610명 경쟁률 대단하다. 앞 뒤 옆 사람들이 다 떨어져야 내가 된다는 결론이다. 면접을 통과해야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교육 후 가능성을 평가받고 최종 합격까지 1년의 시간이 걸린다.
면접을 위해 주어진 과제는 옛날 전통 이야기를 외워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고 입담도 암기도 약점인데 괜히 시작했나. 차라리 입 닫고 문제의 정답을 찾는 시험이라면 좋겠다. 암기하고, 따뜻한 마음, 사랑스러운 목소리, 품위 있는 몸놀림까지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되기 참 어렵다.
손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며 연습을 해본다. 몇 마디 하다 보면 이야기는 버벅거린다. 본문 무시하고 내 멋대로라면 거짓말 참말 꽤 맞출 수도 있는데 원본 대로가 어렵다.
되든 말든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그러면서도 그 날짜가 지나가기까지는 신경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분량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 백지처럼 깨끗한 아이들 만날 생각에 마음만 들떴지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할머니라는 이름뿐이다.
시간이 흘러 면접날이 왔다. 옷은 또 뭘 입지 괜히 신경 쓰인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 합격, 불합격, 의상도 신경 쓰지 말고 사람 구경이나 하고 오자. 마음을 내려놓고 가장 편하고 익숙한 복장으로 면접장으로 향한다.
평상복으로 편하게 입고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량한복을 얌전하게 차려입은 사람.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멋 내기한 사람. 정장 차림으로 온 사람. 따박따박 구두를 신은 사람. 운동화를 신은 사람. 굽 낮은 단화를 신은 사람. 나름 최대한 꾸미고 온 50대 중반부터 70대 중반까지 할머니들의 대잔치다.
직원들이 접수처에서 신분증 확인 후 명찰을 찾아 건네주며 누구 할머니 누구 할머니 부른다. “어머, 날 보고 할머니래” 하며 멈칫하는 젊은 할머니들. 요즘 할머니들은 왜 이렇게 다 예쁘고 젊은지 뒷모습을 보면 저 아가씨는 여기 왜 왔나 싶은 사람들도 할머니라니. 요즘 오십 대 중반은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다.
면접 시작하기 전 대기실에서 면접 과정을 안내하고 소개하던 담당자가 “호칭은 공통으로 할머니라고 합니다. 할머니란 말이 듣기 싫고 거북하면 지금 조용히 나가셔도 됩니다” 농담 삼아 이야기했지만 모두 제자리 꿋꿋하게 지키고 앉았다.
준비한 만큼 이야기 잘했다는 사람 열심히 준비했지만 긴장감에 버벅거렸다는 사람. 숨 쉴 겨를도 없이 달달달 외우기만 했다는 사람. 그러고 보니 나도 이야기가 아니라 외우는 수준으로 끝낸 것 같다. 좀 더 느긋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이야기하다 면접관과 눈이 딱 마주치니 버벅거리며 빨리 끝내자는 마음뿐이었다. 결과야 어떻던 면접날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해시계를 만든 장영실, 조선시대 용기 있는 김성일, 고구려시대 을지문덕 이야기를 우리 손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요행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