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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May 28. 2024

등짝에 불이 났다

처음으로 울뻔한 이야기(27개월)

두 돌이 지나도록 엄마 아빠랑 떨어진 적이 없는데 2박 3일 동안 할머니와 지내야 한다. 처음으로 엄마아빠와 떨어져 있어야 하니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잘 있겠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비행기는 떠났다. 우리는 날아갈 날개도 없는데 조용히 잘 살아보자.


아침부터 먹고 놀고 자고 쉬고    해가며 하루가 저물었다. 저녁까지 먹었으니 조용히 잠만  자면 오늘 하루는 안녕이다. 이제 우리 양치하고 목욕할까? 좋다고 깡충깡충 욕실로 따라오는 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금  시간까지 별문제 없이  지냈으니 고마울 뿐이다.


목욕만 끝나면  잠잘 시간이다 야호. 목욕도 간단하게 하자. 샤워기  온도를 적당할 정도로 맞추었다.  이제 목욕하자. 옷을 홀랑  벗긴 아이 등에 샤워기 물을 뿌리자 아이가 기겁을 한다. 깜짝 놀라 샤워기 물을 잠그고 “으앙” 비명을 지르는 아이 등을 바라본 순간.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일을 어쩌지, 어쩌지.


손녀 그 여린 등이 벌겋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금방 물집이라도 부풀어 오를  같은 비상사태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되지. 그 연한 피부가 화상을 입었다. 기절하겠다.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하나 당황스럽다. 아이를 끌어안고 응급실로 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이 열두 바가지다.


뜨거움에 놀란 아이는 '앙앙앙앙' 죽겠다고 운다. 울어서 해결된다면 할머니도 목청 높여 더 크게 울어버리고 싶다. 아이고오. 애 잘 보고 이 무슨 꼴인가. 아이 본 공 없다더니 큰일만 냈다.


어른이라도 그 상황이면 깜짝 놀라 욕이라도 한방 내질렀을 것이다. 가끔 샤워기 물이 생각보다 뜨겁거나 차갑게 나와서 깜짝 놀랄 때가 있기는 한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깜짝 놀라 우는 아이와 가슴을 맞대어 끌어안고 안정시키는 동안 울음은 거쳤지만 빨갛게 익은 그 여린 등을 보니 너무 속상해서 할머니가 미쳐버릴 것 같다. 바보바보 바보, 할미가 바보다. 할미의 경험 부족으로 아이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고 죄스러워 둘이 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목욕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아이만 바라보고 앉았다. 옷을 입힐 수도 고 미안해서 눈을 맞출 수도 없. 정말 물집이 볼록볼록 생긴다면 어쩌나 무조건 응급실로  요량으로 아이 상태를 살피며 제발,  정도는 아니기를.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등에 하얀 얼룩이 생긴다. 깜짝 놀라 빨갛게 울던 피부도 이제 조금씩 깨어나는 모양이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디에서 금광을 발견한 것보다 더 반갑다. 아 다행이다. 응급실은 안 가도 되겠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지켜본다. 두 시간이 지나니 피부는 거의 본색으로 돌아왔다. 후유, 숨 한번 크게 쉬며 그만하길 다행이다. 죄 없는 일이었으니 그 정도 경고로 끝나는구나.


명심 명심 또 명심!


아이 목욕은 무조건 온도 맞춰 물을 받아 놓고 시키자. 실수하기 전에 미리 깨달았으면 이런 고생도 안 할 텐데. 간 떨어질뻔했다는 말이 딱 이럴 때를 두고 한말일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덜렁거릴 것도 없었다.


손녀를 조용히 잠재우고 나니 온몸의 힘이 쫙 빠지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기진맥진 쓰러질 것 같다. 이럴 땐 어떤 상노동보다도 아이 보는 일이 최고로 힘들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결합된 육아, 고생한 보람도 없이 죄인이 될 뻔했다.


우리는 앙앙 소리 지르며 바들바들 떨고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되살아났지만, 비행기 타고 날아간 네 아빠 엄마는 이런 사정 저런 사정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만의 휴가를 잘 보내고 있겠지. 우리 이 일은 절대로 말하지 말자. 꼭꼭 약속해.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혼자 약속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녀는 아직도 말을 잘 못하기에 엄마 아빠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잘한다면 할머니가 어쩌고 저쩌고 당한 그대로 다 말할 텐데. 이럴 때는 말 늦은 덕을 보는 것 같다. 할머니 입만 꼭 다물면 되니까. 하여간 오늘은 십년감수 한 날이다.


생고생했으니 밤새도록 한 번도 깨지 말고 푹 자거라. 덕분에 할머니도 기진 맥진한 상태로 죽은 듯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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