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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Oct 18. 2024

만나자 이별이네

풀꽃 시비 앞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풀꽃이란 시비가 울면서 내게로 왔다. 우산을 쓰고 앞만 보고 걷는데 어쩐 일로 내 눈에 띄었을까. 2년이 가깝도록 그 곁을 지나다녀도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 시비가.


어느 모퉁이 돌아가다 우연히 만났던 작은 풀꽃처럼 풀꽃이란 시비도 그렇게 만났다. 뭐지,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 까만 돌판 앞에 섰다. 반가운 시였다. 아주 작고 예뻤던 풀꽃을 바라보며 감동받았던 그때를 생각하며 시를 읽고 다시 또 읽었다.


무심한 발길을 멈추게 한 걸 보니 말없이 서있는 너도 관심이 필요했구나. 누구에게 예쁘다 사랑스럽다 관심받지 못해도 꽃을 피우며 자기 할 일을 다하는 풀꽃처럼 이 시비도 언제부터였는지 항상 그 자리에 서있었을 것이다.


밥에 진심이 통하는 듯한 정겨운 순점이네, 태림이네 밥집 덕이네 집밥. 밥집 간판은 잘 읽고 다니면서 풀꽃이란 시비는 알아채지 못했다. 관찰력부족 무심함이 들킨 것 같아 말 못 하는 시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읽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맞다 풀꽃을 보듯 돌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도 자세히 보니 다 예쁘다. 비에 젖어 주르륵 눈물 흘리는 너도 오래 들여다보니 사랑스럽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너를 생각하면 사막을 혼자 걷는 심정이라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수시로 만나 눈인사라도 나누자.


날마다 확인은 안 했지만 시비를 만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밤새 내린 비로 오전 내내 날씨도 흐리고 마음도 꿉꿉하다. 우연히 시비를 만났던 날처럼 시비가 있는 그 길로 지나가고 싶었다.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에 시가 당기는지 풀꽃이란 시나 한번 읽어보자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럴 수가, 시비가 없어졌다. 당연히 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무거운 시비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시비를 빼내버린 자리는 무덤을 파내버린 묘터처럼 가마니로 덮인 빈자리만 남았다. 어디로 갔을까. 비록 무생물인 돌판이었지만 사라진 시비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그곳에 그 시비를 세울 때는 무슨 마음으로 세웠고 철거할 때는 또 무슨 마음이었을까. 반가웠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있다가 없으니 허전하고 섭섭하다. 정도 들기 전 이별이라니.


그 자리는 무슨 용도로 쓰일지. 꽃무릇처럼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되려나. 새로 단장한 시비가 다시 돌아오려나. 그 자리는 며칠째 흉터처럼 남아 있다. 빈자리를 볼 때마다 아 쉽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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