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수필
나는 우울증이다. 그렇다. 나는 방금 일종의 커밍아웃을 했다. 방금의 문장에는 단 한 번의 큰 용기가 실리지는 않았다. 그 문장에 담을 용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차곡차곡 쌓아뒀으니. 오늘의 글에서는 우울증과, 그것을 감내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려 한다.
처음 어떻게 우울증에 걸렸고, 그것이 왜 지금까지 이어졌는지에 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전의 수필들에서 많이 언급하기도 했고, 이 글에서는 우울증의 기원 대신 모습을 집중 조명하고 싶기에.
우울증은 아름답지 않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운석이 떨어져도 결코 사라지거나 틀리지 않을 사실이라고 단언해 본다. 적어도 내가 느낀 우울증과 내가 바라본 우울증의 모습은 그리 환하지 않았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이 강하다고 했나. 그러나 우울증은 빛이 강하지 않음에도 어둠이 강했다.
그 어둠이 가장 짙었을 때는 말 그대로 잠만 잤다. 도로 위에서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수많은 약봉지를 털기도 했다. 뭐, 다 옛날이야기다. 더는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졌기에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겠지.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우울증은 당시의 나를 죽이려 들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나 그 생각에 두려워지지는 않았다. 당시의 나는 죽음과 가장 가까 이 있었지만, 동시에 죽음에 겁먹지 않았다.
다만 죽음보다 두려웠던 존재가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렇지. 나를 포함한 정신 질환자들은 그것을 죽음보다 두려워한다. 그러니 숨어 지내고 밝히지 않지. 커밍아웃을 한 나조차도 나의 투명 사실을 알린 이가 많지 않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애인에게도 겨우 밝힌 사실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에게 밝힌 나의 마음가짐이 있었다. 나는 결코 나의 우울증을 나의 핑계로 사용하지 않으려 애쓸 테다. 그리고 양지를 걷기 위해 음지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칠 테다. 그런 마음가짐을 수년 전부 터 품었다. 남들과 다른 배려를 받고 싶지 않다. 그런 말을 건넸다. 필사적으로 내가 이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많이도 두려웠으니까. 나의 투병 사실로 인해 누군가가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를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볼 사실은 꽤 두렵다.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내가 정말 아끼고 아끼는 이라면 더욱. 생각해 보면 딜레마다. 밝히자니 그가 나를 떠날까 두렵고, 밝히지 않자니 언젠가 그가 알게 되었을 때 서운해할까 걱정이 앞선다. 그렇기에 나의 커밍아웃도 수년간의 준비된 용기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친구의 입에서 정신질환 의가사 제대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가족에게 이런 내가 부끄럽다는 말을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위축되었고, 주저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욱 고마워진다. 이런 나의 모습을 앎에도 나를 떠나지 않는 이들에게 감사하다.
하나 당부의 문장을 던지자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주변에 우울감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가 있거나 느껴진다면, 평소와 다르지 않게 대했으면 한다. 그것이 나를 비롯해 건강하고 주체적인 삶으로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우울증 환자에게 외려 힘이 될 테니. 글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