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자몽 Oct 22. 2024

매 순간의 (나를 살게 했던) 취미생활

베란다 대파 이야기(7)

'덕질'을 조금 순화해서 또는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를 생각해 봤는데, 굳이 꼽자면 취미생활? 정도가 될 것 같다. 비록 조금 약하게 느껴지겠지만...




2003년, 시작
몇 가지 취미생활


20여년을 함께한 건담 친구들 ⓒ청자몽

예전에 취미가 뭐예요?

라는 질문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했지만, 정작 진짜 취미생활스럽게 뭘 해본 적이 없다. 그러던 것이 손으로 만져질 만한 무언가를 하기 시작한 게 2003년부터였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매달 얼마씩 자기 개발비를 줬다. 단 그냥 주지 않았고, 결제한 영수증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고 영수증을 제출했다. 그러다가 다들 하는 흔한 거 말고, 좀 다른 걸 해보자 싶었다.


마침 회사 근처에 프라모델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살짝 고민을 하다가 건담을 샀다. 사실 건담 시리즈는 잘 모른다. 그냥 '건담'이라는 로봇 만화가 있었다는 정도. 만약 그 가게에 태권브이가 있었으면 태권브이를 사서 조립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로봇을 하나, 둘씩 사서 조립하기 시작했다. 어느 달은 큰 건담도 사고, 그다음 달은 작은 건담을 사서 조립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건담을 산 영수증을 냈다. 경리팀 직원분도 영수증에 적힌 건담?! 을 보면서 웃으셨다. 그렇게 즐겁게 자기 개발비를 받기 시작했다.




그다음 다른 것


2000년초 한참 유행하던 십자수 ⓒ청자몽

건담 몇 개를 사서 조립하다가, 뜬금없이 십자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참 십자수가 유행했다. 많이들 하는 열쇠고리도 만들고, 쿠션도 만들다가 점점 꿈이 커져갔다. 그래서 시계도 만들고 작은 액자도 2개나 만들었다.


경리팀 직원분이 이번에도 십자수?! 하면서 웃으면서 처리를 해주었다. 그런데 건담하고 십자수하고 좀 거리가 있는데.. 재밌네요.라고 했다. 재밌죠? 하는 저도 재밌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를 주니 좋은 거 아닌가요?




취미생활 덕분에...


건담이나 십자수를 하면서 책도 사서 읽고, 영화도 보며 참 재미나게 잘 지냈다. 그러면서 잘 적응하지 못해 삐걱거리던 회사생활도 차츰 익숙해져 갔다. 취미를 열심히 하려고 회사를 다니는 건지, 회사를 다니며 잘 살아보려고 취미를 열심히 하는 건지 모르게.. 취미생활은 내 삶에 사르르 녹아들기 시작했다.




( 출처 : 내 블로그 글에서 사진 캡쳐 )

이후로 다른 나라에 몇 년 사는 동안 건담 조립이나 십자수는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화분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식집사 아닌 식집사가 된 것이.. 꼭 화분에 심긴 식물 말고, 무 밑동도 잘라 키워보고 당근도 물에 꽂아 키웠다. 자꾸 죽이면서 그래도 뭔가를 계속 키우기 시작했다.

잘 키우지 못해도, 간혹 죽이기도 하지만 식물을 돌보고 잘 키우는 일도 꽤 좋은 취미였다.  초록이 주는 기쁨이 컸다. 초록을 보며 힘이 나고, 위로가 되었다. 타국에 살면서 울컥울컥 하는 힘듦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식물 키우기는 이후로도 계속하고 있다.



베란다 화분, 조만간 활짝 핀 '파꽃'도 볼 예정 ⓒ청자몽

누군가 보면 저걸 왜 할까? 싶게 한심한 취미일 수도 있는데, 본말이 전도된 것처럼 그 아무것도 아닌 취미나 덕질이 일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참 이상하다. 가끔씩 축 쳐지고 늘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다가, 내가 저거라도 해야지. 하며 툴툴 털고 뭔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덕질이든 취미든.. 나의 본업과 상관없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신기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다. 우리는 참 별거 아닌 거에 힘들고, 별거 아닌 것에 위로와 힘을 받으며 그래도 살게 되는 것 같다.



원글 링크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