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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자몽 Oct 25. 2024

베란다 파 이후의 이야기 : 그냥 좋아서 하는 일

베란다 대파 이야기(10)

봄에 뜬금없이 대파를 화분에 심었다. 꽃을 보고, 대파씨까지 보았으나.. 이후로 시금치나 배추도 녹는다는 무더위가 이어지면서, 베란다 화단 식물들도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화분에 씨를 심게 됐다.



이게 두 번째/ 세 번째 시도


씨앗을 뿌려서 식물 키우기가 정말 어렵다. 땅 넓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는 새싹들 ⓒ청자몽

씨앗을 심어 식물을 키우는 건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방학 숙제로 강낭콩을 심고 키웠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꽃집 등에서 파는, 이미 화분에 심긴 식물을 키웠다.




첫 번째,


다*소에서 8월 중순에 봉숭아와 해바라기 씨앗을 샀다. 딸아이가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고 싶다며 씨앗을 사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씨앗을 심자고? 순간 잠시 고민했다. 키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물들이기를 해보고 싶다고 조르기에, 봉숭아 씨앗을 샀다. 사면서 옆에 해바라기 씨앗 봉지도 하나 더 샀다. 해바라기는 내가 키워보고 싶었다.


집에 가져와서 별 기대 없이 화분에 나눠 심어줬다. 싹이 날까? 하면서... 그런데 뿌린 대로 모두 싹이 났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그런데 모두 길게 웃자라서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처음이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대충 찾아보니(대충 찾아본 게 문제) 흙을 더 뿌려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싹 주변에 흙을 듬뿍듬뿍 채워줬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서 들여다보니 싹이 모조리 다 죽었다. 뭐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새싹들이 흙에 파묻혀 이생을 마감했다. 본의 아니게 '흙장'을 한셈이다.




두 번째,


다시 열심히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씨드볼'이라는걸 샀다. 씨드볼이란 동그랗게 뭉친 흙덩어리 속에 씨앗이 들어있는 형태를 말한다. 화분에 씨드볼을 올리고, 흙을 살짝 덮어주어 주면 됐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지. 라는건 역시 나의 착각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씨드볼로 심은 봉숭아는 싹이 났지만, 씨드볼 해바라기는 결국 싹이 나지 않았다. 다시 잘 검색해서 괜찮아 보이는 해바라기 씨앗을 샀다. 화분에 심어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해바라기도 싹이 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다시 용기를 냈다. 찾는 김에 다시 잘 찾아서, 봉숭아 씨앗도 사고, 내친김에 토마토 씨앗도 샀다. 화분에 조심스럽게 심어줬다. 조심스럽게 심어준 봉숭아 씨앗들도 기특하게 무더기로 싹을 틔워줬다. 작디작은 토마토 씨앗에서 아주 조그만 싹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흙을 채워주지 않고, 딱히 싹도 고르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하는 일


대파를 키우고, 죽여봤다. 옛날에 엄마가 키우시던 게 생각나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하고 시도했다가, 자를 때마다 냄새가 엄청나게 나는 걸 경험하고는 더 키울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대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씨를 사서 화분에 심고 여러 번 죽이고, 이제 겨우 싹이 나고 있다. 잘 키울 수 있을까? 궁금한데, 문득 추워졌다. 진짜 끝까지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다. 실컷 웃자라고 있다. 지지대도 사서 대주고 매일 눈도장을 찍는다.


대파니 봉숭아니 해바라기니.. 참 뜬금없다. 뭐 한다고 맨날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벌이는가 싶다. 끝까지 다하지도 못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오늘은 물끄러미 베란다 화단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답도 없다.




땡볕에 살아남은 초록 친구들. 내 베란다 화단. ⓒ청자몽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베란다 볕의 강도나 세기 등등이 다 파악이 안 돼서, 가지고 있던 화분 중에 일부를 잃었다. 있던 것도 죽이고, 새로 해보는 시도들도 실패하거나 아직 진행 중이다.


다소 엉뚱하고 먹고사는데 아무 관련이 없는 일들을 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일에 애를 쓸까? 생각해 보니, 과정이 좋아서인가 보다. 정성을 쏟은 어떤 것이 잘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좋은. 나는 그게 좋은 거다.


뭔가가 되거나 될 것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 그런 게 아직 있다니.. 나쁘지 않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글쓰기도 그런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별별 노력을 다해도 결국 싹 한번 튀어보지 못한 채 사라진 프리지어 구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아침마다 환기하며 인사하는 나의 초록 친구들(식물)에게 좋은 기운을 받는다.


몇 년째 글을 쓰지만, 그렇다고 뭐가 되거나 뭔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그냥 삶의 일부가 됐다. 때 되면 일어나고, 밥을 먹고, 늘 해야 하는 일상 중에 하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근사한 꽃이 피기 전에 눈이 먼저 내릴까 걱정된다. 꽃까지 못 보더라도, 씨앗들의 생이 다할 때까지 잘 키워보고 싶다.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고, 꽃까지 보는 일은 아무래도 보통일이 아닌 것 같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대단한 일인 게 분명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쓰는 일을 나는 계속하고 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의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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