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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하는 이모씨 Jun 09. 2023

0-2.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경고야.

진짜 지금이 맞아? 아니면 도망쳐!

수업을 듣는 학생이야기다.

이미 타대학을 졸업했고 수의사자격시험도 합격한 학생이다.      

그 학생은 과제를 제일 불성실하게 해 온다. 물론 과제의 양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과제를 충실히 해오는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그들과 비교해 독보적인 수준으로 하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그 친구는 영화를 안 해도 돌아갈 때가 있으니 영화를 딱 낭만의 수준만큼만 하려나보다 했다.

사실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딱 20년 전 저 자리에 앉아 영화에 모든 걸 걸었던 그때의 내가 심통이 났나 보다. 수업 후 그 학생을 붙잡았다.      


"내가 00 씨를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인가요?"     

오해라면 바로 잡을 기회를 주고 싶었고 오해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는 절박했던 저 자리를 입학 때 비워줬어야 했다는 원망을 하고 싶었다. (당연히 속으로만)      


그 학생은 질문을 받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눈물이 살짝 맺히는가 싶더니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 경우라면 아니라고 두 손을 흔들며 변명을 늘어놓는 게 보통이니까.      

"그래요? 00 씨는 불성실하군요"     

그 학생의 눈에 다시 눈물이 비쳤지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찝찝한 마음이었고 일어서다 말고 문득 물어봤다.      

"그런데 왜 울지 않아요?"     

눈물이 몇 번이고 스쳐갔지만 정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나는 도로 앉아서 조금 기다렸다.

그동안 내 앞에서 울고 간 학생이 수두룩 해서 이럴 때는 가만히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는 걸 배운 바 있다.


한참을 울고 나자 학생은 지금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울증 때문에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지만 자신은 의지만 가지면 얼마든지 집중할 수 있고 과제를 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 불성실해서 숙제를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고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우울증임을 받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면 자신이 정말 환자가 될 것 같은가 보다.

수의사지만 의학을 공부한 그 학생에게 '환자'라는 의미는 의학을 모르는 우리와는 좀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차라리 환자가 되느니 불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그리 어림이 된다.


"할 수 없어요. 하지 말아요. 하려고 기를 써서 아픈 걸로 부족해 스스로를 불성실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요"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 학생은 그냥 아픈 중일뿐이다.

그런데 아픈 것도 억울한데 불성실하다는 오해까지 받고 있다.

아니,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도록 자신을 내깔려뒀다. 정말이지 지독히도 나쁘다.


나는 그 학생에게 앞으로 과제를 절대 제출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점을 잘 줄 수는 없으니 최하위 점수를 주거나 F학점을 줘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학점보다(장학금이 꼭 필요한 학생들은 다르지만) 교수의 피드백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음학기든 내년이든 괜찮아졌을 때 꼭 피드백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글부터 이야기를 만나는 과정을 기록하려고 한다. 따라오다 보면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쓰고 있을게다.

그런데 도망쳐야 할 사람은 지금 도망치길 바란다.

아주 어려운 일이니 감히 덤빌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허세 섞인 엄포가 아니다.

별것도 아닌 이 과정에 굳이 끼어들어 자신을 혹사시키거나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이 그때가 아닐 수도 있다.

언제가 기운이 나면 그때 하면 된다.


내가 열정을 가지고 써 내려가는 글이 누군가에게 화상이 입힐까 겁이 난다.

나의 애정이 너를 뜨겁게 할까 봐 무섭다.

그러니 나 같은 시시한 감독의 글은 그냥 우습게 여겨주길 바란다.

니가 이러니 봉준호 박찬욱이 아닌 거라고 비웃어주는 게 차라리 너의 진짜 눈물을 보는 것보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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