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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하는 이모씨 Jun 06. 2023

0-1.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번아웃을 눈치 못채는 지금이 진짜 번아웃일지도 모른다.

"감독님 지쳤어요. "     


함께 일을 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대표님이 한 말이다.

동트기 전에 제일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아예 제작의 희망이 안보였다면 이렇게 길게 갈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계속 제작 목전에서 마지막 문턱을 못 넘기를 반복하다 보니 모두가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대표님이 나는 서운했고 그래서 진짜 버럭 화를 냈다.      

"나를 내가 알지 대표님이 나를 어떻게 알아요?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지쳤다고 해요?"     

대표님이 먼저 나자빠질라고 선수를 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고 정말 매일매일 성실히 글을 쓰고 또 썼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와 내 작품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글이 더 안 좋아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보는 내 글이 점점 더 부끄럽게 여겨졌다. 

얼마 후 이 시나리오로 상을 받으면서도 안도보다는 뭔가 잘못됐다는 불안이 더 컸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그 작품을 놓겠다고 결정했다.      



그 이후 만 2년을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글도 쓰지 않았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없었다면 정말 미라가 돼버렸을 것이다.  

이것도 지금 돌아보니 그렇더라 싶지만 그때 나는 남편도 아이들도 만사가 다 버겁기만 했다. 

하루하루 내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했던 것뿐이지 정말이지 나는 아무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그때서야 알았다. 이런 게 번아웃이구나...

그때까지 나는 무능력한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1년쯤 쉬고 나니 그제야 내가 번아웃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때 알았다. 

번아웃 상태에서는 번아웃인 것도 모른다. 

좀 쉬고 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알아지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서 내가 지쳤다는 것도 눈치챌 기운이 없는 상태가 바로 번아웃이더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번아웃의 중심에서는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지쳐서 그런 거라는 걸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참지 않는다. 

하다못해 유튜브라도 본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그렇다. 

내가 그간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고 공부했던 것들이 싹 다 지워질 것 같고 내 인간관계가 나빠질 것 같고 갑자기 원치 않는 살이 찌거나 빠질 것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쉽게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까먹지도 않고 그렇게 쉽게 사람들에게 잊히지도 않는다. 

좀 쉰다고 근육이 그렇게 한 순간에 빠지지도 않는다. 


물론 나는 그렇게 2년을 쉬는 통에 지금 빈손이다. 

네이버프로필은 비어있고 당장 제작이 임박한 시나리오를 들고 있지도 않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더니 딱히 좋은 일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딱히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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