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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하는 이모씨 Jun 01. 2023

0. 나에게 최악의 가해자

나야. 날 좀 내버려 둬.

존경하는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나리오를 써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자신의 입던 팬티를 세상사람들에게 벗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이렇게 앞뒤 설명 없이 적고 보니 감독님께서 혹시라도 모욕적인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그 말씀은 그만큼 작가가 되는 것은 자신을 내어놓는 일이라는 깊은 이해를 구하시며 길고 깊은 설명 중에 하신 짧은 전언을 비루한 필력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래, ㅆㅂ 작가는 그런 거지 하면서 허세 섞인 자조를 했었는데

이제 감독이 되고 정말 이야기로 밥을 먹고 살다 보니 그 말씀이 이제야 진정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이 정말 아프다.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면 나는 그것이 그렇게 무겁다.

학생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 발자국씩 질문을 하며 다가가다 보면 문득 학생의 마음 어딘가에 와있다. 가끔은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깊은 곳에 와 있어 작가가 느끼는 그대로 나도 똑같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그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곁에서 따라가는 나도 이리 힘이 든데 막상 그 마음으로 파고 들고 있는 학생들은 오죽할까.

그러니 글을 쓰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게 아직 글을 쓰는 것에, 스토리를 정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삼천포로 빠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 감정을 직면하기 힘들어서 핸들을 꺾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그들은 그걸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작가적 스킬이 부족하다고 자책을 하고 어떤 이는 작법서를 읽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상한 말이지만 잘못된 이 진단은 선생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럽다.

저 진단에는 작가적 스킬을 보강하거나 성실히 공부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공부를 한다고 해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무뎌지지 않는 고통이다.

나의 가장 약하고 더럽고 저급한 곳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학생들이 힘든 건 당연한 것이고 동시에 어떻게 한들 비켜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걸 용서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걸 힘들어하는 자신을 정말이지 최고로 한심해한다.

정말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기를 미워하고 탓한다.

그러면서 성실하겠다, 성공하겠다며 글을 쓸수없는 지경에 있는 자신에게 굳이 지금 쓰게 한다.

그렇게 해서 절대 잘 쓸 수 없는데 계속해서 쓰게 하고 기어이 피드백을 받게 하고 기어이 지적을 받고 비평을 받게 자기 자신을 내깔려둔다. 그리고 너무 당연히 돌아오는 부정의 단어들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절대 안 된다.

작가는 세상에 작품을 내놓은 그 순간까지 아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확신을 확인할 수 없는 직업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고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런 자신과 자꾸 마주하면 절대 끝까지 갈 수 없다.

행여 그렇게 라도 인정받는 작가가 되면 더 최악이다.

죽을때까지 같은 방법으로 나를 가해하며 인정받는 작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테니 말이다.

나라는 가해자는 정말 최악이다.

고소를 할수도 없다. 감옥에 가둘수도 없다.

그 무력함앞에서 나라는 가해자와 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나라는 피해자를 해치기도 한다.

절대 안된다.

쓰기 싫으면 쓰지말아야한다.  

오늘 하루 안 쓴다고, 올해 한 해 늦어진다고 세상 어떻게 안된다.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도 여전히 내 안에 최악의 해자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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