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가방을 하나 주문하려고 했다.
10여만 원의 가격대로 가방전문 쇼핑몰이길래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나의 쇼핑력이 고갈된 탓에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컴퓨터를 껐다.
그랬더니 그 이후부터 컴퓨터만 켰다 하면 그 가방 배너가 끊이지 않고 화면에 떴다.
빅데이터의 성실함에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떤 배너 중에 같은 디자인의 가방을 근 200만 원에 가까운 가격에 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려던 것이 짝퉁이었던 거다.
그때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23살 때 일이다.
그때 나는 검은색 패브릭 가방으로 지퍼 부분과 손잡이 부분만 가죽으로 된 커다란 빅백을 들고 다녔다.
당시에는 동대문에서 쇼핑하는 게 보통이었을 때니 아마도 동대문에서 샀던 거 같다.
밀리오레, 두타 뭐 이런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23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을 왜 들고 다녔을까 싶지만
학생 때니 들고 다닐 것은 많고 그렇다고 책가방을 들고 다니기는 싫었나 보다 싶다.
여하튼 나는 그 가방을 잘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연극배우이신 중년의 여자교수님이 똑같은 가방을 들고 수업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내 가방을 본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내 가방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그 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한들 아무도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첨언하셨다.
나는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이미 그게 짝퉁인걸 알고 있었던 언니들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그 가방이 프라다 짝퉁 가방인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정말 명품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지금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샤넬마크를 보면 샤넬이구나
프라다 마크를 보면 프라다구나 정도는 안다.
그때는 그 정도도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는 교수님 말씀에 그렇구나~ 싶었다.
되러 아니, 반바지에 운동화 신고 다니는 스무 살짜리가 고가의 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회상하는 지금, 낯이 뜨겁다.
명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내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들 아는 걸 모른다는 것이 더 낯 뜨겁고 부끄럽다.
그런데 나도 억울한 것이 이제는 샤넬, 프라다정도만 알아서는 택도 없다.
진짜 이름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 명품이 넘쳐나고 그걸 비켜가는 건 그걸 사는 것만큼의 노력이 든다.
마트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보통 인터넷 장보기를 자주 이용하는데
무료배송을 받기 위해 4만 원을 채우는 과정도 쉽지 않은 나에게 이런 걸 아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묘사도 마찬가지다.
명품 묘사를 쓰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묘사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짝퉁묘사를 피할 수 있다.
나는 앞서 묘사를 옷 입히기에 비유했다.
정말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허헛..
멋진 묘사를 하고 싶다면 짝퉁 묘사를 피해야 한다.
새로운 걸 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방에 손잡이 두 개 달면 명품을 베낀 것이니 세 개 달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클리쉐를 피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클래식과 클리쉐의 한 끗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