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묘사가 좋은 묘사일까?
이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주 아주 복잡하다.
묘사는 서사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 말만 생각하면 묘사는 굉장히 강하고 선명할수록 훌륭해 보인다.
서사를 정확히 드러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말했다.
묘사는 아주 복잡한 아이라고!
'주인공이 취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는 서사를 묘사해 보자.
주인공이 취업을 포기했다! 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주인공이 면접장에 입고 가라고 부모님이 사주신 옷을 버린다고 치자.
이 옷을 그냥 의류수거함에 버리는 것보다 찢어버리는 것이 더 강하고 선명해 보인다.
의류수거함에서 구제할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가능성 마저
씨를 말려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 묘사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소비자들은 앞단에서 이 옷을 사주시며 격려해 주는 부모님을 봤을 것이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주인공과 함께 경험했겠다.
그런데 그런 옷을 버린다니... 같이 눈물이 흘러나올 일이다.
하지만 그 옷을 찢어버린다?
빼도 박도 못하고 확실히 절대 못 입을 옷으로 만들겠다고 가위로 난도질을 한다면
소비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것은 그 자체로는 강하고 선명한 묘사일 수 있으니 너무 과해서 주인공과 무드를 해친다.
여전히 서사를 정확히 드러내지만 나쁜 묘사이다.
왜냐하면 이런 묘사는
소비자들이 주인공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극의 분위기를 험상궂게 만든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 주인공이 부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스토리라면 괜찮겠지만.
묘사는 옷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스토리전체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얼마든지 바꿔 낄 수 있으며 동시에
옷 한 벌로 사람의 인상이 달라지듯 스토리의 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유난스러운 양말 한 켤레,
시선강탈 모자 하나가 그 사람의 전체 패션 밸런스를 무너트리는 것처럼
지나친 묘사는 스토리를 해친다.
작가라면 응당 묘사를 대할 때,
'적당하게'라고 쓰고 '절묘하게'라고 읽어 내야 한다.
적당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어물쩡거리거나 어지간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레시피에 맞게 녹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절묘해진다.
우리는 앞서 주인공이 갖춰야 할 조건을 살펴봤었다.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한 주인공을 만났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이 갖춘 주인공의 특성들을 드러내는 것은 묘사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폐지 줍는 노인을 대하는 모습에서,
부당한 상사를 대하는 모습에서,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지나치게 정의로워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예의 바를 필요도 없다.
영화 <악인전>에서 마동석은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걷는 여중생에게 자기 우산을 건넨다.
그거면 충분하다.
굳이 그 아이를 차에 태워 비를 단 한방울도 맞지않게 집 코앞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
아니, 데려다 줬다면 매력이 되러 반감되었을 것이다.
과한 친절은 부담스러운 데다가 스토리는 늘어졌을 테니 말이다.
코코샤넬도 말했다.
Before you leave the house,
look in the mirror and remove one accessory.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고 하나의 액세서리를 제거해라.
적당하자. 절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