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그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나는 시나리오 자체를 너무 재밌게 읽었다.
이 영화가 잘 되었으니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은 것이야 당연한 말 같지만 사실 내용 자체만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다.
할머니가 사진을 찍더니 젊어진다고?
결국 손자를 위해 그 젊음을 포기한다고?
게다가 신파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대사가 완전 음성지원하는 것처럼 생생해서 진짜 키득키득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이 실제로 할머니와 오래 같이 살아서 자신의 할머니의 말투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더라.)
나는 이 스토리를 지인 몇 명에게 전했는데 사람들 반응은 정말 처참했다.
그런 거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사람들이 이런 유치한 신파를 좋아할까?
혹시 내가 너무 재미없게 전달한 건 아닌지 의심받는 것은 사양하겠다. 나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 아니... 쩝쩝
나만 재밌었나? 정말 재미없는 건가?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 나 스스로를 타박했다. 이리 보는 눈이 없어서야....
하지만 이 영화는 곧 제작이 확정되었고 보란 듯이 흥행했다.
그것도 부족해 수많은 나라에 리메이크판권까지 팔아치운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나는 이 경험을 하면서 말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하게 되었다.
물론 말로 영화의 재미를 전달한다는 건 실상 불가능하다.
당연하지. 그럴 거면 영화를 뭐 하러 만들겠나?
하지만 영화가 될 스토리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 방식이 유효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내가 전한 건 단순한 줄거리가 전부이다.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말맛이나 소소하지만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전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만약 황동혁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쓰며 블레이크가 추천한 테스트 마케팅을 했다면 과연 지금의 시나리오가 나왔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영화를 태초에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번 양보해서!
우리의 지인이 스토리는 모르지만 스토리에 적당한 관심과 냉철한 통찰력의 소유자라고 치자.
그리고 나는 스토리를 정말 완성될 작품만큼이나 재밌게 설명할 수 있는 달변가라고 치자.
그러면 그렇게 들은 상대의 의견이 정말 도움이 될까?
나는 이런 식의 ‘한번 팔아보는 경험’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블레이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블레이크는 그 확신을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앞으로 짧으면 수개월, 길면 한없이 길어질 작업의 시간을 혹시라도 허비하는 것보다는 본격적인 집필이 시작되기 전에 이런 검증을 해서 후배작가들이 가치 없는 수고에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선배작가의 애틋한 마음은 알겠다. 사실 기성작가들은 저 과정을 이미 트리트먼트 과정에서 한다.
이미 트리트먼트만 두고 계약을 논하고 시쳇말로 입질이 없으면 아예 집필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작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왜?
그럼 평생 한 작품도 못 쓸 수 있다.
이제부터 당신이 쓰려고 하는 작품은 ‘완성’의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사공을 만난다. 블레이크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스토리를 멈춰야 하는 순간을 정말 무수히 만나게 된다.
이 과정은 앞으로 지난하게 이어질 작업과정에 대비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 스토리를 믿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도움닫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정말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동의가 아니다.
바로 작가 스스로 스토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작가에게 스토리를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과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숙명적 사명감에 더 기반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건 기성작가들에게도 모두 그렇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글쓰기 과정은 미치도록 지겹고 지치고 힘들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블레이크는 역시 할리우드 상업영화시나리오작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는 그래서 흥행작이 없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흥행작가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하기로 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냥 꾸준히 엉덩이를 깔고 앉아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하다 보면 더 좋은, 정말 더 더 좋아지는 글을 쓰게 되고 마침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제작에 실패하더라도 자기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해 보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그 작품이 제작에 실패할지언정 당신을 작가의 반열로 올려놓는 데는 분명히 일조한다.
하지만 이런 테스트 마케팅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흥행하는 시나리오를 쓰기는 커녕 일단 완성하는 시나리오를 쓰기조차 힘들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블레이크의 테스트마케팅방법으로 당신의 갈 길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말 그대로 누가 봐도 작가라고 할 만한 반열에 오른, 제작 목전에 가는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되고 나서 써먹을 방법이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작이다.
그렇다면 그 자기 확신이라는 것은 어떻게 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