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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루아 Apr 30. 2022

화려한 시절

<3000자 단편>

'오는게 아니었는데.’

세현은 후회하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빠져나왔다. 발코니의 열린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 멀리 화려한 불빛의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찾았다”

멍하니 야경을 바라보던 세현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와인잔을 놓치고 말았다. 와인잔이 허공에서 잠시 머물다 빠르게 낙하하는 순간, 그보다 더 빠르게 커다란 손이 와인잔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라면 들고 있는 물건을 놓치는 습관은 여전하네요.”

고개를 돌리자 세현보다 머리 하나는 커 보이는 남자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세연은 부지런히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 정도 외모면 쉽게 잊을 얼굴은 아닌데… 왜 전혀 기억이 안 나지? 낯이 익은 것 같긴 한데…혹시?’

“아하하! 혹시 며칠 전에 저랑 제 친구들이랑 ☆☆주점에서 같이 술 마신 분 중 한 명? 제가 그날 술을 많이 마셔서 2차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죄송한데 이름이…”

세현의 대답에 웃음기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하! 술을 마셨다고요? 기억도 안 나게?”

“그게… 생일이라 친구들이 폭탄주를 만들어 줘서요. 제가 평소에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데…”

쩔쩔매며 변명하던 세연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쩔쩔매지? 남이사 술을 마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왜 변명을 하지?’

한마디 톡 쏘아붙이려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슈크림처럼 살살 녹는다.

‘아니, 무슨 남자가 보조개가 저렇게 귀엽담? 속눈썹은 나보다 더 긴 것 같고.‘

요리조리 뜯어보는 세현의 시선에 그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 초여름이지만 아직 밤바람은 차요. 감기들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요.”

그가 다정하게 세현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었다. 20년은 유행이 지났을 것 같은 낡고 촌스러운 숄이지만 따듯하고 보드라웠다. 숄에서는 초콜릿과 바닐라가 섞인 듯한 따스한 냄새가 풍겼다. 그가 부드럽게 세현의 어깨를 파티장 쪽으로 이끌었다.

“조그만, 조금만 있다 들어가면 안 될까요? 파티는 너무 지루하고 심심해요. 사실 저는 파티나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거든요. 친구가 하도 부탁해서 같이 온 건데, 친구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파티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세현은 왠지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그가 살짝 한숨을 쉬며 곤란한 표정을 짓자 세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거절당한 게 부끄러워서였지만 그는 세현이 실망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깐만이에요. 진짜 감기 걸린다고요.”

그때, 누군가 파티장과 연결된 문을 열었는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에 있을 때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골이 울리는 것 같았는데, 야경을 보며 듣는 은은한 음악 소리는 세현의 마음을 묘하게 달뜨게 했다.

“춤추실래요?”

세현은 평소였으면 상상도 못 할 대담한 질문을 충동적으로 하고 말았다.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럴까요?‘

세현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자 시원한 바람이 세현의 귓가를 스쳤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장에서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큭.”

다시 한번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웬 나이 든 할머니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저 할망구, 또 지 죽은 남편인 줄 아나보네.”

“저한테 말씀하시는 거세요? 저 아세요, 할머니?”

세현의 말에 그 할머니는 끌끌 혀를 차며 그에게 말했다.

“김 간호사는 맘도 좋아. 그걸 매번 받아주네. 노망도 참 희한하게 들었어. 얼른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 매번 밤에 자다 말고 나오는 통에 우리까지 감시가 더 심해진 거 몰러?”

어안이 벙벙한 세현에게 그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들어가요.”

그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 손이 보였다. 세현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바라보았다. 눈을 비벼도 보았다. 영락없는 쭈글쭈글하고 반점이 잔뜩 있는 노파의 손 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 내가 또 정신줄을 놓았구나.’

벌써 이 년째였다. 이 년 전 같이 요양원에 있던 남편이 먼저 떠난 후 세현은 부쩍 치매가 심해졌다. 요양원에 있는 남자 간호사를 남편으로 착각하기 일쑤였고, 밤마다 자다 깨서 요양원 마당에 나갔다. 수치심은 빠르게 슬픔으로 변했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거주춤 서 있는 세현에게 그가 삐뚤어진 숄을 다시 고쳐 덮어 주었다. 요양원에서 입는 환자복 바지 안에 축축하다 못해 소변 무게로 축 쳐진 기저귀가 느껴졌다. 세현은 그를 따라 어기적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나는 시끄러운 파티 음악는 질색인데 멀리서 들리는 음악 소리는 괜찮네요.”

  세현이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또다시 남편을 처음 만난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봄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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