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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Jul 07. 2021

고통의 깊이가 글의 깊이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역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겪는 고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장본인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함부로 타인의 고통을 섣불리 위로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설령 동일한 아픔을 과거에 겪었다 하더라도, 나에겐 그 고통이 이미 과거가 된 이상,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명할 수는 없다. 우울증을 겪어봤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는 비교적 행복하다면, 진부한 위로의 말을 건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그래서 고통이 삶을 잠식해올 때,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피로 글을 쓰는 걸 추천한다. 결국엔 휘발된 감정이기에 고통이 덮쳐올 때만 써내려 갈 수 있는 절망이 있다. 그 순간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그 고통에서 파산되는 외로움, 두려움, 절망이 영혼을 으스러버린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깊이로는 써내려가야 훗날 삶이 더이상 지옥이 아닐 때 읽어도 어느 정도 희미한 고통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안 좋았던 기억을 무엇 때문에 기록하냐고 묻느냐면, 이런 고통의 깊이가 글에 기름을 불지르는 최상의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도, 대중의 고통도 아닌 나 자신만의 고통이 글쓰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글을 피쏟아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글을 읽어라. 어쩌면 읽는 내내 너무 어둡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드는 글을 많이 읽어라. 그런 글을 많이 읽을수록 세상을 향한 나의 연민과 이해심을 키울 수 있다. 어차피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읽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게 으스러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읽어나가라.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함부로 이해할 수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시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고대하기만 하는 노인의 우울을 우린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읽어라.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다 못해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없음을 저주할 때까지 읽고 또 읽어라. 


내 몸 속에 축적한 고통의 깊이가 너무 깊어, 세상의 핏방울이 고여 골짜기를 이룰 때, 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절망도, 두려움도 나를 두 번 다시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눈빛이 닿는 곳곳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침내 저주스러웠던 삶 대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세상에 감사하고, 현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 만물만사를 담을 수 있는 크나큰 우주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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