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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Oct 11. 2020

어느날 눈을 뜨니
세상이 변해있었다.  

내 삶에 주도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할 시기


한 번 팽창된 세계가 다시 응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바늘구멍 같은 자궁을 찢고 탄생하였으니 탄생의 고통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확장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탄력성을 잃고 너덜너덜해진 몸조차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는 곳이 달라졌으니 삶의 방식도 달라져야한다. 10개월 동안 갈고 닦았던 모든 삶의 지혜가 무용해지는 우주에 도달했다. 고집해오던 삶이 무의미해진다는 건 꽤나 절망스러운 일이다. 단지 하나의 삶을 부여받았고, 생존하기 위해 그 삶을 종교로 받들곤 했다. 그 삶의 방식이 잘못됐는지 옳은지 판단할 길조차 없었다. 부여받은 삶은 하나의 절대적 업보였다. 단지 삶이 눈 앞에 놓여있기에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받들였을 뿐이다. 내가 사랑을 주면 똑같이 나를 사랑해주는게 당연하던 세계였다. 다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은채 존재 그자체로도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어떤 예고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던 하나의 작은 세계가 무너진다. 나만을 포근하게 감싸던 양수가 별 의미 없는 액체가 되어 세상에 배출된다. 일 년 가까이 함께 숨쉬던 세계가 소멸된다. 지켜오던 평화와 삶의 방식이 이제는 팽창된 우주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비좁았는지를 깨닫는다. 문득 내가 사랑하던 가치관, 언어, 세계를 모두 배반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팽창된 세계의 잣대에 의하면 내가 고수해오면 삶은 이제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게 갈망하여 닦고 닦던 삶의 업보들이 터져버린 양수와 함께 배출물이라도 되는냥 하수구를 타고 내려간다. 


오랜 기간 이 작은 세계 속에서 장악하고 싶은게 있었다. 허나 그 이상을 마침내 손에 넣었을때는 이미 세상은 변해버린지 오래였다. 심지어는 이상을 이뤄낸 나조차도 이전의 내가 아님을 직감한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 난 뒤엔 세상도, 자신도 달라진지 오래다. 이상은 이상 그대로 일지 몰라도, 콘텍츠가 변해버린한 이상은 이전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같은 검을 쥐고도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검이 될 수도 있고, 새까만 피를 묻힌 살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선과 악은 무의미하다. 선악이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정의되기 마련이다. 


탄생 이전의 세상이 존재 그 자체였다면 이제 시시각각 변동하는 세상에선 내가 직접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수동적 태세에서 능동적 태세로 변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쥐었다 박탈당하는 것에 대해 어디 불평할 곳도 없다. 숭배하던 신은 사라진지 오래고, 나를 지켜주던 세상도 소멸된지 오래다. 홀로 세상에 태어나버린 비애를 어디 호소할 곳도 없다. 탄생과 함께 내지른 괴성은 광대한 우주 앞에서 메아리 한 번 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태어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한가슴 앉고 산다.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것은 이 죄책감을 덜어내고 덜어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양수와 함께 흘려보낸 세상이 그리워 눈물을 쏟지만, 그 울음마저도 결국엔 거두어야 한다. 


재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운다. 정신적 교감으로 이루어지던 대화도 이제는 언어를 필히 수단해야함을 습득한다. 탄생과 함께 몸에 각인된 생존 본능에 몸을 맡긴다. 아직은 이 강박증적 생존 본능만이 내 삶을 가능하게 할 제물이다. 그렇게 생(生)의 부스러기를 하나하나 주워담는다. 이 사소한 부스러기들이 하나둘 쌓여 다시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삶이 비극이어선 안된다. 삶이 고삐풀린 말처럼 파국으로 치닫게 두어서는 안된다. 어느 장소에 있던, 어떤 언어를 사용하던 삶이란 최대한 밝게 빛나고 어여쁜 것이여야 한다. 그것이 설령 어느날 또다시 파괴될 고집이라 해도. 새로운 땅에서 살아숨쉬는 삶이란 아주 진귀하고 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내가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눈물이여야 하고, 내가 언성을 높힌 다면 그것은 오로지 정의만을 위한 것이여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안착하되 자궁 속에서 부르던 노랫가락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를 지켜주던 포근함, 안락함, 사랑, 그리고 온기 따위를. 탄생자체는 비극이었을 언정, 나를 존재케 한것은 분명 어둠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던 빛조각 덕분이었기에. 


모두와 함께 웃음꽃을 피되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척박한 세상에서 상대에서 먼저 신뢰를 심어줄줄 알아야 한다. 올곧고 강인하되 그 속에서 섬세한 감수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같이 추잡하고 비열해져서는 안된다. 상반된 배경에서 오는 이들이라도 결국엔 모두 생의 숙명을 타고난 사람이란 걸 잊으면 안된다. 


내던져진 세상에 척박하고 실망스럽다면 더더욱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감수성을 모색해야 할 이유다. 


팽창된 차가운 우주 어딘가에서도 또다른 꽃이 존재한다 믿는다. 작은 손짓, 떨림 하나에도 활짝피는 그런 꽃이.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팽창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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