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잔인한 배신은 완벽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BGM: Aurora - I Went Too Far (Live) 음악 재생 추천
https://www.youtube.com/watch?v=Y2AqeH1GPs4&ab_channel=iamAURORAVEVO
원래 마음이란 변덕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추스리기 힘든 날들이 있다. 불과 조금 전까지도 아무 생각없던 마음이 별 이유없이 싱숭생숭하다. 심장의 미동은 점차 증폭되어 손끝 발끝까지 원초적 불안을 전염시킨다. 쓸데없는 의구심이 수면위로 튀고, 여지껏 살아온 길에 대한 자책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어느새 눈보라로 어지럽다. 이 길이 앞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애초부터 옳은 길이, 방향이 있었나. 잔잔하면서도 위태위태하다. 고만고만하면서도 불안불안하다. 제 아무리 숙련된 외줄타기인이라도 외줄을 탈 때마다 어찌 가슴 떨리지 않으리랴.
이럴 때면 감정을 탓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무마시키고 둔해지려 한들 꺼지지 않는 불씨마냥 한 번씩 고개를 드는 놈이 괘씸하기도 하다. 발로 짓밟고 모래를 퍼부어 보아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쥐꼬리만한 불씨는 다시금 타오른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불안은 특히나 더 그렇다. 누군가 잔잔했던 수면 위에 돌을 던졌으면 그 사람 탓이라도 하지. 물 속 깊이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파동은 ‘~때문이야’ 하고 원망할 수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던 파동은 오로지 내 것인 것을.
머리로 이해한다하여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수학 개념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세상의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닌 듯이. 알고는 있다. 이것도 한 순간 인 것을. 다만 당장에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눈보라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가 더 시급한 문제다. 생존에 직결된 문제 앞에서는 멀리 내다볼 여유가 없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증폭은 가중된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는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든다. 얼어붙는 얼굴과 휘몰아 치는 눈보라의 배경음악은 극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만 생각하게 된다. 머릿속에는 고장 난 카세트마냥 일정 구간만 반복 재생된다. 하필이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이다. 클라이맥스를 찍기 전 평화로운 폭풍전야의 모습이다. 가장 아름다웠을 때 덮쳐오는 공포가 가슴 깊이 각인되는 법이다. 가장 잔인한 배신은 완벽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럴 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방어벽을 쌓는 일이다. 아예 유리병에 나를 가두어 버린다. 눈보라 속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최상의 임시방편이다. 그 속에서 세상을 음소거시키고, 체온을 회복하며 두 눈을 부릅뜬다. 뿌옇기만 하던 눈보라를 낱낱이 뜯어보는 연습을 한다. 눈보라가 아닌 눈 결정체를 본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고 눈보라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유리벽 뒤에 숨은 내 모습이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우선 수면 위로 올라와야 숨을 쉬는 법이다. 한 숨가득 들이마시고서야 다시 물 아래로 내려가 발목에 묶인 해초를 푼다. 어쨌든 다시 유리병 밖에 나가 직면해야 할 눈보라다.
이 눈보라도 결국에는 눈 결정체들의 집합이다. 뾰족하게 날을 세웠지만 손끝만한 온기만 닿아도 녹아내릴 아이들이다. 가만 보면 조금 덜 날카롭고 여린 아이들도 더러 있다.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나를 닮은 결정체들이다. 나다. 이 결정체들은 나다. 내가 퍼뜨린 씨앗들이다. 내가 잘 보살피고 다듬지 못해 두려움에, 외로움에 이성을 잃은 나의 분신들이다. 그런 나를 이제서야 뒤늦게 마주한다.
살며시 유리병에 두 손과 얼굴을 마주대어 본다. 유리를 통해 전해지는 냉기에 내 몸을 내준다. 유리병 밖에서는 나를 잡아먹기로 작정한 듯한 눈보라가 전심을 다해 부딪힌다. 종을 울리듯. 유리병이 흔들릴 때마다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낀다. 유리병 밖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그 떨림을 느낀다. 이성을 잃고 증오심에 불타는 그들의 소리없는 흐느낌이다. 무성영화를 보듯 들을 수 없는 울음이지만, 오히려 너의 떨림으로 인해 전율을 울리는 슬픔이 된다. 한恨이다.
사방에서 스멀스멀 냉기가 올라온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겠다고 옷을 감싸입은 내 꼴이 우스워 진다. 차라리 옷을 벗는다. 벌거벗은 몸으로 눈보라를 마주한다. 온 몸으로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가슴으로 안을 준비를 한다. 병 안의 온기와 병 밖의 냉기가 만나 유리병이 쩌적쩌적 갈라진다. 내 두 손을 맞댄 곳에 나의 두 손 자국이 생긴다. 유리병 밖의 눈보라도 그 위에 손을 맞댄다. 마주잡은 두 손 사이 벽에 금이 간다. 내 마지막 남은 온기를 거두어 간다. 그리고 유리병이 완전히 무너져 다시 눈보라 속에 던져질 때 나 또한 눈 결정체가 된다.
너의 한기를 나의 온기로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택없이 작고 보잘 것 없다. 차라리 나도 너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포효가 아니다. 너와 하나가 되지 않고는 너를 진정시킬 수 없다. 우리는 몸을 섞는다. 지난 이십여년 모른 척 방치했던 너를 이제서야 뒤늦게 안아준다. 길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너와 한몸이 되어 사랑을 나눈다. 그 뿐이다. 내 아무리 불타는 태양이 된다 한들, 너의 응어리진 마음을 녹아 내리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저 너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힘껏 사랑한다. 이미 타이밍을 놓쳐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사랑을 이제서야 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불씨가 타오른다. 어떻게 밟아도 꺼지지 않던 그 얄밉던 불씨가 또 한번 불꽃을 일으킨다. 나를 괴롭히던 방해꾼이라고 생각한 네가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를 둘러 에운다. 쥐꼬리만하던 불씨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다. 감정이 격해진다. 영문도 모르고 터져나오는 눈물은 녹아버린 극악했던 눈보라다. 너를 꼭 부둥켜안고 응어리졌던 울음을 목놓아 터뜨린다. 우리의 흐느낌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