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아들이는 세상이 곧 나의 성숙도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
세상을 살아가며 부딪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그 충돌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움, 원망, 차별, 증오, 편견, 심지어 혐오. 그 속에서 내가 포용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는, 스스로의 한계는 얼마나 될까 자문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말하고 단정을 지어버린다. 나의 시야 밖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무지를 용기삼아 삿대질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설명해주어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아는 척을 해댔었는가. 이미 쌓아온 편협된 경험을 토대로, 그것이 진리이고 지혜인마냥 설교해대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내 그릇의 한계를 따라 그려줄 때마다 드는 반감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고의 증표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이해하다 못해 사랑해버리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역경 후에도 아직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있는 탓이다. 내가 경험한 세상이 넓어질수록 희석되는 기대감과, 마지막 남은 호기심이란 불씨마저 꺼버린 실망감을 숨기지 못한 탓이다. 자조적 해탈에 가까운 모습을 깨달음이라고 단정 짓는 건, 정말로 아직도 그 너머를 볼 줄 아는 혜안을 터득하지 못한 탓이다.
자신이 아는 세상의 윤곽을 그리라하면, 개개인이 그리는 윤곽의 모습은 제각각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먼저 보는 이는 사랑을 그릴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보는 자는 미움을 먼저 그릴 것이다. 개개인이 그린 윤곽 모두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깨닫지 못한채, 자신이 목격한 세상만이 정답이라고 또 의미없는 논쟁을 해댈 것이다.
이미 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이들은, 이미 더 많이 깨달은 이들을 그 마저도 어린아이의 싸움을 지켜보는 냥 사랑스럽단 눈길로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줄 것이다. 지금의 나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용과 용서의 깊이에 홀로 꿈틀거리는 마음이 곧 내 성장의 현주소를 대변할 뿐이다.
나는 다만 오늘도 최대한 내가 그릴 수 있는 세상의 윤곽을 그린다. 이 삐뚤빼뚤한 그림 속에서도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을 수용하며,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는 마음을 얹히려 노력할 뿐이다. 내가 겪어온 삶이 타인의 다름을 배척하고, 남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이 되는 것이 아니듯. 내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깊이에 대한 갈증으로 묵묵히 내 세상을 넓혀가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