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인 사랑만 받다 태어나기로 한 이유
백마디 말보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한번이, 찌릿하게 살갗을 스치는 손길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직 얼굴조차 모르는 어미의 내리사랑에 세상을 이해받고, 자그맣게 고동치는 심장은 영혼을 흔들다. 태아는 미처 성장을 마치지 못한 입술을 오물이고 고사리같은 손을 움직여 그 사랑을 그려보고자 한다. 하지만 자궁 안에 웅장히 메아리치는 제 어미의 목소리에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거둔다. 당신의 사랑은, 영혼과 영혼이 접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무엇으로도 함부로 그릴 수 없다. 얼굴도 모르고,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않고도 자신을 존재케 하는 사랑에 숭고함을 넘어 탄생의 묵직함을 느낀다. 탯줄의 떨림만으로 당신의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을 구분한다. 당신의 숨소리 하나에 세상이 무너지고 탄생한다. 아직 만나본 적조차 없지만 매일같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순간순간 영혼을 나누는 사람이다. 사랑받고 있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의 숙명으로 엮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궁을 찢고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간이다. 알 듯 모를듯한 웅웅거림이 퍼지는 표정이 탄생하기 이전의 공간이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람의 눈빛이 읽히고, 그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앞으로 태어나서 아주 많은 말과 생각을 나눌 그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온몸으로 교감한다. 말은 무겁다. 글도 거추장스럽다. 어떤 매체도 통하지 않고 가녀린 흐느낌과 호흡만으로 사랑한다.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부터 짝지어온 운명이라는 것을 어찌 감히 거스를 수 있으랴. 사랑하는 당신을 바라보기 위해 탄생의 순간만을 손꼽아왔단 걸. 아직 느껴본 적 없는 당신의 손길과 입맞춤이 그리워 세상에 태어났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힘들었던 날들, 나를 그리워하던 날들, 행복에 젖어 황홀해하던 날들 따위가 태아의 무의식 속에 심어져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이 모든 교감을 함께 한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어쩌면 무지하기에 용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 당신 한사람이 궁금해 자궁밖에 머리를 내밀었다. 이 탄생이, 세상이 어떤 의미를 담는지 몰랐다. 탯줄 하나에 의존하던 삶을 포기하고 태어났다. 나로 인해 울고 웃던 당신은 누구인지. 일 년 가까이 나에게 사랑노래를 속삭여준 당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탄생과 즉시에 직감한다. 낯선 세상의 빛과 공기가 달콤하지만은 않을거라고. 태어나버린 마음 앞에 나는 어쩌면 앞으로 몇 번이고 망가질지 모른다고. 그럼에도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에 당신을 미워할 지는 몰라도 죽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거라고. 눈이 멀어버릴듯 세상은 밝았고, 처음 들이마신 공기에 폐는 타들어갈 듯듯한다. 탄생이란 이렇게 아프도록 황홀한 것임을.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세상의 온갖 쓸쓸함도 함께 안고 태어난 것을.
그렇지만 그리도 그리워하던 당신의 눈빛 한번에, 살의 온기에 이 모든 역경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수억번도 더 그려본 당신의 얼굴이 내게 내려와 입맞춤을 수놓는다. 나의 성급함을 용서받는다. 나의 탄생이 구원받는다. 이마에 맺힌 핏덩어리를 닦아주고 탯줄을 잘라주는 당신이 고맙고 아퍼 목을 놓고 운다. 그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댈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내가 자랑스럽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탄생"
모두가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깊은 무의식으로 떠나는 성장형 에세이. 숨겨두었던 기억 속 어둠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어 내면의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는 치유의 여정. 태어나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서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