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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Oct 27. 2024

60대 K장녀는 치매 엄마를 돌봐야할까?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 5편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는 90대 치매 할머니와 60대 딸, 20대 손녀가 함께 살며 겪는 따듯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엮은 장편 소설입니다. 본 소설은 완결까지 탈고된 상태로 브런치 공모전 용도로 맛보기차 업로드합니다. 공모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편씩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큰딸이 할머니가 사는 둘째딸 집 근처로 이사 온 건 그때쯤이었다. 딱히 할머니 근처로 이사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코로나로 부동산이 미쳐 날뛴 탓이었다. 몇 년 동안 무탈하게 지내오던 집주인도 코로나로 휘청거렸는지 갑자기 월세를 배로 올렸다. 그 바람에 큰딸은 집값을 맞춰 서울 외곽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큰딸은 20년 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큰딸의 이사 날짜가 잡히자 동네 사람들 모두 믿을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20년 동안 가족같이 지내던 동네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있는 법. 큰딸이 외곽으로 이사를 온 뒤, 두 딸들은 20대 이후 처음으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두 집은 차로 10분이면 왕래하는 거리였다. 


장녀로 태어나 7살 때부터 동생들을 업어 키우다시피한 큰딸이었다. 할머니가 돈 벌러 나간 동안 아이가 아이를 키운 셈이었다. 큰딸은 장녀답게 어려서부터 집안일, 밥, 청소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시골에서 자라 한겨울에 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얼음물로 설거지와 빨래를 하던 7살이었다. 청소년기에는 할머니의 엄마가 쓰러져 8년 동안 집에서 할머니를 도와 똥오줌을 받아냈다. 


그래도 큰아들 밖에 모르는 할머니에게 장녀라는 이유로 제일 많이 등짝을 맞아가며 컸다.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성인이 되자마자 대학은커녕 바로 장사에 뛰어들어 산전수전을 겪은 큰딸이었다. 


그때는 장녀가 희생하는 게 당연했다. 장녀라서 자기 인생을 희생해 바쁜 할머니 대신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왜 자기만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면 큰딸은 가출을 일삼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버려 둬”하고 일하기도 바쁘다고 그러려니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저 다들 식구가 너무 많아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 돈 벌기 바빴다. 큰딸은 동생들만큼은 절대 가난하게 키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갓 스무살 때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술장사를 해 또래보다 일찍 크게 성공했다. 직원들을 얼마나 잘 부렸는지 한 번 들어온 직원은 아무리 쫓아내도 나갈 생각을 안했다. 새벽마다 깽판 치는 동네 조폭들과 텃세 싸움을 하다가 조폭 동생들이 생기기도 했다. 술장사를 크게 해 당시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대기업 총수, 임원, 판검사, 국회의원 등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만 보고 장사해 그 화려한 인맥 한 번 자기한테 이롭게 써본 적 없었다. 오히려 자기를 쫓아다니는 대기업 임원들을 두고 덜 떨어진 놈한테 시집 갔다 얼마 못 가 이혼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은 고스란히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와 사업자본과 결혼식 비용으로 들어갔다. 큰딸은 일찍이 서울에 자기 명의로 된 아파트를 장만할 만큼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끔찍이 아끼는 큰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하자 그 집을 팔아 되살려 놓았다. 20년 뒤 서울의 그 집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집값 중 하나를 자랑했다. 


오냐오냐 키워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막내 여동생은 세 딸 중 제일 먼저 덜컥 남자친구 아이를 임신했다. 놀란 큰딸은 가지고 있던 주식을 급처분해 결혼비용을 장만해줬다. 늘 어딘가 썩 마음에 들지 않던 막내 딸의 남자친구가 기어이 사고를 쳤다며 결혼식 당일까지 가슴이 미어졌다. 결혼식 날 표정이 유난히 어둡던 막내 딸은 결국 15년 뒤 이혼을 했다. 그때 처분한 주식 이야기는 20년이 지나서도 안주거리가 되었다. 


둘째 오빠, 막내 남동생도 돌아가며 크고 작은 사고를 친 건 마찬가지였다. 한 놈은 해외 나가 사업한다고 생활비를 보태주고, 한 놈은 전셋집에서 쫓겨났다고 집 장만할 목돈을 부쳐줬다. 하여튼 가족들의 온갖 뒷수습은 모두 큰딸 몫이었다. 그나마 말썽을 안 피운 게 가장 평범하게 전업주부로 산 둘째 딸이었다. 


큰딸 혼자서 그 많은 형제자매 뒷처리를 해주고 나니 다시 거지 깽깽이에 젊은 시절은 다 지나가 있었다. 책을 몇 권을 써도 모자랄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할머니는 자식 복이 많았을지언정, 큰딸은 형제자매 복이 없었던 듯했다. 


한평생 희생만 하고 산 큰딸도 딱 한 번 할머니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도대체 동생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큰오빠밖에 모르냐고. 나만 부려먹냐고. 왜 나만 그렇게 개패듯 두들겨 패냐고. 내가 엄마 돈 벌어주는 기계냐고. 망할 동생들이 아니라 웬수들이라고. 서른살이 되던 해에 30년 동안 응어리졌던 모든 한을 풀듯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할머니에게 퍼부어댔다. 


그러나 할머니는 “니가 고집이 쎈 걸 어쩌라고” 한마디만 툭 던졌다. 너무나도 기가 막혔던 큰딸은 그 뒤로 할머니에게 두 번 다시 대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을 제일 예뻐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다시는 할머니에게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큰딸은 둘째딸 근처로 이사오기 전까지 할머니가 어떻게 사는지 그닥 궁금해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모시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늘 반찬이니 용돈이니 보내 자신이 할 도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째딸 근처로 이사를 오고 난 뒤, 그 집에 놀러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십 년 만에 처음 한 이사로 새 동네가 낯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둘째딸네가 선물해준 안 쓰던 중고차가 생긴 덕이었다. 20년도 넘은 고물 아반데였지만 사실상 방치 되어있던 차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큰딸은 차로 20분이면 왕래하는 둘째딸네 집에 놀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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