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 3편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는 90대 치매 할머니와 60대 딸, 20대 손녀가 함께 살며 겪는 따듯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엮은 장편 소설입니다. 본 소설은 완결까지 탈고된 상태로 브런치 공모전 용도로 맛보기차 업로드합니다. 공모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편씩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번 무기력함에 빠지자 할머니는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생활 속 마찰이 부딪혀 한두 번씩 목소리가 높아졌다. 갈수록 새벽잠이 없어지는 할머니는 아침부터 등교하고 출근해야 하는 온 가족을 새벽부터 깨우기 일쑤였다. 새벽 4시 30분만 되면 귀신같이 일어나 어둠 속에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가족들을 깨웠다. 새벽 등교를 하는 손자 손녀들은 늘 잠이 부족해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다.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이불에 지리는 오줌 때문에 할머니는 둘째 딸에게 등짝을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자주 씻기지 않으면 집안에 노인네 냄새가 날까 봐 깔끔하게 씻기는 것도 고역 아닌 고역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집에 오는 손님마다 노인네 냄새를 맡고 집에 강아지를 키우냐고 물었다.
가족들이 너무 바빠 자기들끼리 급하게 한 끼를 떼울 때면 할머니는 자기만 굶기는 줄 알고 그렇게 세상 서러울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해도 너무한다”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할머니의 모습에 가족들은 밥 먹다 벙찌곤 했다.
다섯 식구가 붐비는 이 집에서 그나마 온전한 할머니의 공간에 가까운 곳은 베란다였다. 고층 아파트에서 따뜻한 햇살이 한가득 차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면 적당히 데워진 바람이 베란다를 매웠다. 할머니는 마음이 허할 때면 베란다에 비치된 휴대용 의자에 앉아 장난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창문 너머로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가 지나가다 사왔다며 이름 모를 예쁜 식물과 모종과 흙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작고 파란 싹을 보고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언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마음 속에 빼꼼 고개를 든 것 같았다. 이때부터 시골에서 300평의 땅을 가꾸던 솜씨로 할머니는 베란다를 작은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커다란 난부터 블루베리 묘목까지 예쁜 것, 화려한 것, 향기로운 것들을 할머니는 아주 정성껏 키웠다.
할머니는 손에서 으스러져 빠져나가는 흙냄새를 맡아본게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뙤약볕에서 감자를 캘 때 두건을 적시던 차가운 땀줄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같이 음식을 해먹던 스님들의 얼굴을 그려보려 했으나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나마 화분과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흙에 물을 주며 할머니는 갈 곳 없는 모든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 베란다에 몇 시간씩 쪼그려 앉아 식물을 바라보다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틈만 나면 식물 옆에 쪼그려 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손자 손녀가 사다준 비료와 영양제도 주고, 식물 잎사귀도 윤이 나도록 닦아주었다. 비록 300평짜리 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였지만, 할머니는 잠시 시골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정체되어 있던 할머니의 시간은 식물과 함께 다시 흘렀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식물들은 할머니의 시간이 아직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베란다는 어느새 봄이면 벌들이 날아오고, 초록잎이 무성해지는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덕분에 집에 오는 사람마다 꼭 한마디씩 베란다가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 처음엔 예쁜 관상용 식물만 키우다가 음식하기 좋아하는 둘째딸이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둘째딸도 할머니와 함께 소소하게 애기상추니, 바질이니, 방울토마토니 등을 키우며 요리할 때마다 쏙쏙 따먹는 재미에 들렸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키운 식물들을 항상 칭찬했다. 할머니는 마침내 자신도 이곳의 일원으로 환영받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한평생 일만 해온 할머니에게 다시 무언가 역할이 생긴 것만 같았다. 무언가 집중할 곳이 생기자 할머니의 생활은 다시 활기를 띠었고, 가족들과의 갈등도 줄어들었다.
봄이 되면 화려한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방충망에 들러붙은 매미가 울고, 가을이 되면 베란다에 쌓이는 낙엽을 치우고, 겨울에는 베란다 창문에 생긴 고드름을 땄다. 도심 속 아파트에도 형형색색 사계절이 담기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계절이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할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이곳을 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할머니는 둘째딸이 사준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고 틈만 나면 동네를 돌아다녔다. 한 번 세상 속에 섞이자 베란다 창문 밖으로만 내다보던 세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노인정 할머니들, 경비 아저씨, 유치원 꼬마 친구들을 만들며 “귀여운 할머니”로 나름 동네 유명인사가 되었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