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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Oct 27. 2024

할머니의 세상은 반경 1km 이내였다.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 1편


*<어느 치매 노인의 일기>는 90대 치매 할머니와 60대 딸, 20대 손녀가 함께 살며 겪는 따듯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엮은 장편 소설입니다. 본 소설은 완결까지 탈고된 상태로 브런치 공모전 용도로 맛보기차 업로드합니다. 공모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편씩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세상은 반경 1km 이내였다. 그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을 때의 크기였다. 할머니 혼자 뒤뚱거리며 걸어 다닐 수 있는 세상은 100 걸음 이내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세상이 처음부터 이렇게 좁은 건 아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 할머니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했다. 덕분에 동네 뒷산부터 샛길까지 매일 몇 시간을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녔다. 지팡이가 닿는 한, 할머니가 가지 못할 길을 없었다. 동네 뒷산을 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대단한 할머니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쭐해져 더 힘차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함께 사는 자식들은 할머니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혹여나 길이라도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회만 되면 가족들 몰래 현관문을 빠져나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아파트 1층 현관문 입구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늙은 노인네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동네 어린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수줍게 배꼽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신나서 “이뻐 이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가족들이 출근할 동안 할머니는 동네에 쏘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도시치고 수풀이 무성한 아파트 정자에 가 바람 쐬기를 좋아했다. 자식들이 용돈을 주어 공돈이 생기면 동네 노인정에 가서 다른 할머니들의 간식거리를 챙겨주었다.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하원할 시간이 되면, 자신의 2/3 크기가 되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도 아이처럼 좋아하였다. 


처음엔 제발 좀 집에 있으라 하던 가족들도 결국 할머니가 없어지면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다행히 할머니에 익숙해진 동네 주민들과 경비 아저씨의 보살핌으로 할머니가 길을 잃을까 하는 시름은 덜 수 있었다. 그 결과 할머니의 다리는 예순, 일흔을 바라보는 자식들의 두 다리보다 더 단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한평생 시골에서 살며 젊었을 때는 혼자 300평 가까이 되는 밭을 가꾸던 분이었다. 여름에는 까마득한 태양 아래 땀을 줄줄 흘리며 두건이 달린 햇빛 가리개를 쓰고 하루 종일 호미질하였다. 겨울에는 검은 고무신을 질질 끌고 수북이 쌓인 눈길을 뚫고 비닐 하우스에서 딸기를 길렀다. 


덕분에 어린 손자손녀들이 놀러 오면 할머니의 밭은 아가들의 놀이터가 됐다. 서리 아닌 서리를 하고, 물 호스를 틀고 하늘에 무지개를 만들기도 했다. 아가들은 크면서 밭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할머니만은 밭에서 뛰놀던 아가들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했다. 가끔 할머니의 호감을 사려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와서 밭일을 도왔지만, 할머니의 호감은커녕 머슴처럼 부려만 먹다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할머니는 꼭 여름에는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밭일하다 힘들면 밭 옆에 붙어있는 다 쓰러져가는 1평짜리 창고에 들어가 잠시 쉬면 그만이었다. 이 거대한 밭을 허리가 구부정해져 가는 조그마한 노인네 혼자 일궜다는 걸 직접 보기 전까지 사람들은 잘 믿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 내내 농사를 짓고 나면 감자, 고추, 호박, 토마토, 깻잎, 배추, 딸기 할 것 없이 모두 서울 사는 자식들에게 보내주고는 하였다. 할머니가 지은 농사는 시골 동네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었다. 대부분 노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할머니는 동네 조그마한 절의 스님들과 함께 김치를 담가 먹고, 된장이나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다. 


달리는 자동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할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농사를 지어 퍼주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동네 똥개들 밥을 챙겨주는 일이었다. 똥개들 밥이라고 해봤자 먹다 남은 음식을 한 곳에 섞어 만든 개밥이었으나, 똥개들은 늘 시간 맞춰 할머니 집 근처에 출몰하였다. 


한평생 남한테 퍼주고 정리하길 좋아하는 할머니의 성격은 훗날 자식과 함께 살 때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시골에서 동네 사람들과 혼자 살겠다던 할머니의 고집은 뇌진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에나 꺾을 수 있었다. 


집에 뇌진탕으로 혼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평소 할머니를 끔찍이 아끼던 스님이었다. 매일 아침 부처님 앞에 물 한 바가지 떠놓고 자식들을 위해 새벽 기도를 드리는 할머니를 스님은 오랜 기간 지켜봤었다. 그래서 종종 그러던 것처럼 정성스레 삶은 고구마를 나눠먹으러 할머니 집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만약 스님이 아니었으면 할머니는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식들이 놀라 달려와 할머니를 서울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스님은 동네가 떠나라 “아이고~ 아이고~” 소리 지르다 할머니가 병원에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MRI/CT 및 각종 검사를 마치고 링거를 꽂은 채 몸이 회복될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했다. 그러나 뇌출혈로 인해 할머니의 인지능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치매기가 돌기 시작했다. 의사는 더 이상 할머니가 혼자 살기는 힘들 것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할머니의 300평짜리 밭과 초라한 시골집은 헐값에 매각되어 할머니를 모시게 된 둘째 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당시 형제 중 유일하게 전업주부였던 둘째 딸이라 큰 고민 없이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래봐야 아무도 찾지 않는 똥촌에 몇십 년 된 쓰러져가는 집이라 고작 회사원 쥐꼬리만 한 연봉 정도의 금액이 나왔다. 물론 전업주부였던 둘째 딸에게는 작지 않은 돈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앞으로 어쩌면 평생 할머니와 살게 될 것에 비하면 약소한 선 지불금이었다. 다행히 자식들은 우애도 좋은 편이고, 할머니를 떠맡긴 미안함에 아무도 그 돈을 욕심내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선택의 여지 없이 도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도시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자주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스님들과 똥개들을 그리워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태우며 할머니의 10년이 흘렀다. 


삶에 대한 의지와 정신력이 누구보다 강했던 할머니는 마침내 시골 할머니티를 어느 정도 벗고 자식들과의 도시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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