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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담백 19화

소:담백 #겨울04 겉바속촉 쑥떡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아홉 번째 독백

by 버들

Chapter 19. 겉바속촉 쑥떡


설날이 되면 할머니는 지난해에 직접 캐서 바싹 말린 쑥과 쌀 한 포대를 구루마에 싣고 집 근처 방앗간으로 향했다.

*손수레가 옳은 표현이긴 하지만 추억을 읊자면 구루마보다 확실한 단어가 없다.

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먼저 온 사람들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에 방앗간 안은 어수선했다.


“떡 하려고요!”

기계 소음에 밀리지 않으려 목에 힘을 단단히 주고 외친다. 주문이 밀려있으니 몇시간 뒤 찾으러 오라는 답을 듣고 방앗간을 나선다.


얼마 뒤 다시 방문한 방앗간.

내부는 여전히 기곗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여 있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주인장은 우리를 발견하자 방앗간 한쪽을 가리켰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쑥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꾸울떡하고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쑥떡을 구루마에 옮겨 싣곤 북새통을 이루는 방앗간을 벗어나 집으로 향한다. 처음보다 묵직해진 무게감에 구루마의 바퀴가 덜그럭 덜그럭 불평을 내었다.


막 쪄낸 쑥떡은 그 열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때문에 손을 데지 않게 단단히 무장을 해야 한다. 할머니는 쟁반 위에 콩가루를 넉넉히 뿌린 뒤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떡을 옮겼다.

쑥떡 본연의 초록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노란 콩가루를 듬뿍 묻혀준다. 아침부터 방앗간 여정을 함께한 손녀의 입에 투박하게 썰어낸 쑥떡을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절동안 먹을 양을 제외하고 나머지 떡은 냉동실로 옮겨 단단하게 굳힌다. 할머니의 손길이 가득 담긴 쑥떡은 긴 겨울방학 동안 손주들에게는 달콤한 과자 못지않은 좋은 간식이 되었다.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어 해동시킨 쑥떡은 약불 위에서 천천히 구워준다. 겉면에 묻은 콩가루 때문에 방심하면 타버릴 수 있으니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 퍼지기 시작하면 불을 끈다. 팬의 뚜껑을 열어 보면 고운 자태의 겉바속촉 쑥떡이 등장한다.


한입 베어 물면 뜨거운 온도에 흐물 해진 쑥떡이 치즈처럼 주욱-늘어난다. 팬에 눌어붙은 부분은 그 식감이 바삭거려 과자 같기도 했다.

구운 쑥떡은 꿀에 듬뿍 찍어 먹으면 가래떡 구이 못지않은 훌륭한 디저트가 되기도 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았냐면, 고3 겨울방학 동안 쑥떡을 주식으로 삼았더니 개학날에 교복치마 단추 잠그기가 버거웠다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

(잊지 말자. 떡은 디저트가 아니라 엄청난 탄수화물 덩어리라는 것을…!)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집은 방앗간 근처 아파트에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자매는 취업을 위해 고향을 떠났고 이따금씩 집을 방문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설날이 되어도 더 이상 쑥떡을 만들지 않았다.

쑥떡을 만들지 않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번거로운 일이 사라졌으니 개운했을까. 아니면 품 안을 떠난 손주들에 대한 서운함이 컸을까.


사실 나는 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매콤한 떡볶이도, 새해면 누구나 먹는 떡국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떡을 사 먹을 일이 거의 없다. 이따금씩 사무실에서 간식으로 받은 떡들은 냉동실 ㅎㄴ켠에서 한참 뒤에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담백의 겨울 주제로 ‘쑥떡’이 떠오른 건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이제는 그 맛조차 기억나지 않은 -콩고물 듬뿍 묻은 한입거리 쑥떡이 그리워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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