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여덟 번째 독백
수박은 특유의 향이 싫어서, 포도는 씨를 뱉어내야 하는 것이 귀찮아서. 사과나 배는 껍질을 깎아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내가 과일을 잘 먹지 않는 이유를 찾자면 이렇게도 많다.
하지만 귀찮음을 이겨내고서라도 먹고 마는 유일한 과일이 있는데, 바로 겨울 제철 과일인 ‘귤’이다.
내가 귤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면, 한창때에는 앉은자리에서 혼자서 귤 반박스를 해치우기도 했다. (물론 위의 크기가 줄어든 이후론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해 전 여름, 코로나에 걸려 골골대던 때에도 온라인 장바구니에 귤을 먼저 담을 정도로 많이 좋아한다. 또한 1인 가구임에도 귤 한 박스를 구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최애 과일이 귤이 된 사실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렇다 보니 귤과 관련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내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의 일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순하고, 잘 먹고 잘 자고 무엇보다 아주 건강한(!)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건강한 아이가 얼굴과 손이 노랗게 변해 있는 게 아닌가. 놀란 부모님은 나를 둘러메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진료실에 들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상태를 묻자, 의사 선생님은 덤덤한 말투로 짧게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귤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네요. 일시적인 현상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
(실제로 귤 속에 함유된 카로틴 때문에, 갑자기 많은 양을 섭취할 경우 손과 발, 얼굴이 노랗게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부모님을 놀라게 한 대가로 한동안 귤 제한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새드엔딩임에 틀림없다.
그 에피소드를 듣고 난 이후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작은 습관이 생겼다. 귤을 집어먹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먹은 귤의 개수를 세게 되는 것이다. 다 큰 성인이 피부가 노랗게 변했다는 이유로 병원을 방문하는 건 조금 부끄러울 것 같으니까.
나는 사계절 중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서운 바람에 몸이 움츠려드는 것도, 옷을 겹겹이 껴입어 움직임이 둔해지는 느낌이 별로랄까.
하지만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귤을 까먹는 재미는 오직 겨울에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마냥 싫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때 먹는 귤은 냉장고에서 막 꺼내 찬기운이 폴폴 흘러나오는 상태여야만 한다. 상온에 있어 미지근하다거나, 단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에 구운 귤이라면 겨울의 별미가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지난겨울엔 귤을 많이 먹지 못한 것 같다. 올해에는 이른 아침 차 위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귤이 먹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