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여섯 번째 독백
“얼른 일어라. 시골 가게!”
시곗바늘이 9시를 가리키기도 전 엄마의 음성이 단잠을 깨운다. 간밤에 겨우 잠이 들었던 터라 눈꺼풀이 너무도 무거웠다. 방문을 열어젖힌 엄마의 모습을 보곤 퉁퉁 부은 얼굴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은 한 해가 끝나감을 알리는 ‘김장의 날’이었으므로.
달력이 한장 남은 12월의 어느날. 김장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진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시골집 앞마당에 소금에 절여 잔뜩 풀이 죽은 200 포기의 배추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 포기라니! 시작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오늘 안에 끝나기는 할까 살짝 두렵기도 했다.
‘김장의 날’ 작업반장인 외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한쪽에서는 양념장(배추 양이 많다 보니 양념장의 양도 어마어마했다)을 만들었으며 또 다른쪽에서는 절인 배추를 인부(?)들에게 배부했다. 각자의 역할에 맡게 김장의 날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야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
어딘가 모르게 엉성한 나의 김치를 본 이모는 깔깔거리며 훈수를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걸 어떡해요-”
민망함에 괜스레 볼멘소리를 내자 이모들 사이에서 난데없는 김장배틀이 벌어진다. 나처럼 해라, 내 것이 더 예쁘다며 투닥거리기까지 하면서.
물론 이 대결의 승자는 없다. 각자 버무린 김치는 각자의 김치통에 옮겨담아 각자의 집으로 가게 될 테니.
기상예보에서는 예년보다 따뜻한 날씨가 될 거라고 했으나 해가 저물어갈수록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시간 이어진 작업에 코끝이 빨개지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절인 배추 더미가 동이 난 뒤에야 드디어 김장의 날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장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뜨끈한 수육에 갓 담근 김장김치를 얹어 먹는 것 아니겠는가. 바로 먹을 김장김치에는 시원한 생굴을 넣어 버무렸는데 이 또한 별미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던 피곤함, 허리도 못 펼 만큼 고단했던 김장의 노고가 김치와 고기, 생굴이 합쳐진 삼합 한입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부모님 품을 벗어나 혼자 살게 된 지 어언 4년 차.
김장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가져다주신 김장김치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갓 담근 김장김치는 흰쌀밥에 먹어도 맛있지만, 이번에는 큰마음 먹고 수육을 해보기로 한다.
배달시키면 수고로움 없이 따뜻한 보쌈을 먹을 수 있지만 각종 양념장과 플라스틱들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엄마의 주방보조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왠지 모를 불안함에 유튜브로 반복학습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전공부를 끝낸 뒤 마트에서 오돌뼈가 붙은 통삼겹살 한팩을 구매했다.
이번에 학습한 수육은 바로 ‘무수분 수육’이었다. 통삼겹살을 넣고 된장, 양파, 대파, 통후추, 마늘, 커피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1인가구에게 번거로운 일은 딱 질색이다. 한 끼를 위해 많은 재료를 구입해야 하다니 효율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
반면 무수분 수육에는 양파, 대파, 수육용 고기, 딱 세 가지만 필요하다. 물도 필요 없다. 냄비 바닥에 양파와 대파를 깔고 그 위에 4면을 골고루 초벌로 구워준 통삼겹을 올린 뒤 50분가량 가열해 주면 된다. 양파와 대파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냄비가 탈 걱정 또한 없다.
잘 익었을까 노심초사하며 냄비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색깔을 입은 통삼겹이 보인다. 막 꺼낸 수육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온다. 날이 잘 선 칼로 슬근슬근 한 점을 썰어내 보는데 다행히 속이 알맞게 익은 듯하다. 정갈하게 썬 수육은 접시에 가지런히 옮겨 담고 서둘러 곁들일 양념장도 마련한다.
쌈장에 알싸한 청양고추를 어슷 썰어 넣는다. 마늘은 편으로 썰어 작은 종지에 담는다. 이제 진짜 주인공이 나올 차례이다.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김장김치를 한 포기 꺼내어 먹기 좋게 썰어준다. 왠지 세로로 찢은 것이 맛이 더 좋은 것 같아 길게 잘라 접시에 올렸다.
드디어 나의 인생 첫 수육을 맛볼 시간이다. 상추와 깻잎 위에 고기한점과 김장김치 한 조각, 그리고 청양고추를 품은 쌈장 약간, 마늘을 넣고 쌈을 오므린다. 입을 크게 벌려 한입에 쌈을 삼킨다. 1시간 가량 푹쪄내져 보들보들한 고기의 식감과, 아삭한 김장김치의 식감이 한데 어우러진다. 어려울 것 없이 완성된 수육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올해는 엄마에게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워볼까 한다. 내가 만든 김치와 수육으로 부모님께 한상 거하게 차려드릴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