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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담백 20화

소:담백 #겨울05 사골국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스무 번째 독백

by 버들

Chapter 20. 사골국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머리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는 계절, 겨울이 오면 할머니는 연례행사처럼 사골국을 끓이곤 했다.

그날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건너편 풍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유리창엔 김이 서려 있었고, 훅훅한 기운이 집안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사골국을 끓이는 과정이 보통일이 아님에도 그녀는 매 계절마다 그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겨울을 건강히 보낼 수 있게 하고 싶어서였을까.


국을 끓이기 위해서는 창고 깊숙한 곳에 자리한 커다란 곰솥을 꺼내와야 한다. 솥안에 사골과 잡뼈, 찬물을 붓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핏물을 빼준다. 중간중간 물을 교체해 주기도 해야 한다. 핏물을 뺀 뼈는 센 불에서 한번 끓여준 뒤 검붉은 불순물이 올라온 물은 그대로 버려준다. 이제야 사전 준비과정이 끝났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사골국을 끓이는 단계이다.


불순물이 남지 않게 뼈와 솥을 깨끗이 씻어준 뒤, 다시 물을 가득 채워 센 불에서 끓여준다. 상단에 떠오른 거품과 기름은 수시로 제거해주어야 한다. 또한 중간중간 물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한차례 끓여낸 뜨끈뜨끈한 사골국물은 보관용기에 옮겨 담아 한 김 시켜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곰솥에 뼈를 다시 옮겨 담고 그 위에 깨끗한 물을 붓는다. 앞선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길고 긴 여정이 끝이 난다. 처음 끓여둔 사골국과 마지막에 끓여낸 사골국을 섞어 한소끔 끓여주면 사골국 만들기 대장정이 끝이 난다.


우리 집에선 사골국에 소면이 아닌 당면을 넣어 먹었다. 기름진 사골국물을 잔뜩 머금은 당면을 호로록 삼킨 뒤 그릇 채 국물 한 모금을 삼킨다. 찐득한 기름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그 다음엔 흰쌀밥을 국물에 말아 한 입 크게 떠 넣는다. 이때 푹 익은 깍두기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바깥 세상은 역대급 한파로 차가웠지만, 할머니의 사골국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따수웠다.

글을 쓰면서 열심히 떠올려봤지만, 사실 할머니가 사골국을 끓이던 과정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가스레인지 위에 무거운 곰솥을 올리는 역할만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때문에 사골국이라는 것이 오래 걸리는 음식인 줄 알았지만, 이토록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기 피부처럼 뽀얀 사골국물 뒤로 모든 임무를 완수한 뼈 더미가 보인다. 뜨거운 불 위에서 오랜 시간 영양분을 뽑아낸 탓일까. 처음에는 없었던 구멍들이 잔뜩 생겼다.

한겨울 사골국은 할머니의 사랑과도 같았다.

우리는 할머니의 사골국을 먹으며 건강한 겨울을 보냈다. 아니 어쩌면 할머니의 고생을 담보로 한 영양분을 먹어서 건강할 수 있었던 걸까.

손주들이 없는 시간엔 무거운 솥단지를 손수 오르내리고, 저녁이면 아무 말 없이 허리와 어깨에 파스를 붙이던 할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짙어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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