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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Apr 10. 2021

프렌치 지쟈스를 만났다구요

나의 구원자, 거기에 계셨군요

이곳에 사는 내내 파리는 인류애를 떨어트리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가뭄에 콩 나듯 친구들을 통한 미담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나도 다니엘도 어느 날 훅 들어오는 친절은커녕 잔잔하게 스며드는 차별이나 범죄들만 접해왔기 때문에 살면서 내가 파리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순간이 정말 있을까?라고 자문해볼 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스스로도 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런 내 앞에 프렌치 지쟈쓰가 나타났다. 내가 정열적으로 준비한 델프 시험날 아침에 말이다. 이날 프렌치 지쟈쓰, 이하 지선생과 다니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매일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지냈을 것이다.

 중요한 시험 전날이니 10시 반에 잠자리에 들었다. 졍빌리에까지 가서 시험을 치려면 한 시간 반은 일찍 집에서 나가야 할 테니까. 나는 꽤 쉽게 잠이 드는 편인데 하필 1년에 두세 번 있는 불면의 밤이 시험 전날일 건 뭐란 말인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아도 보고, 더 얇은 잠옷을 입어도 보고, 다니엘 등짝에 달라붙어도 봤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몸이라도 쉬자는 생각에 10시 반부터 새벽 두 시 반까지는 거의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새벽 한 시 반쯤인가, 눈을 떴더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닌가. 가까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도를 당했었는데 이젠 내 차례란 말인가, 그런데 거실에는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우리 애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 이걸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일단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10분을 누워있도록 거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 순간 다시 불이 꺼졌다. 너무 무서운데 다니엘을 깨웠다가 별 일이 아니면 민망하고 이미 불도 꺼졌기 때문에 용기를 내 밖에 나가봤다. 고양이는 무사했고 숨어있는 사람도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받은 수경재배 조명이 오작동을 한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을 더 씨름하다 잠들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지만 여섯 시 반쯤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네 시간이라도 잔 게 어딘가 하며 일어났다.

 그렇다. 매우 찝찝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밥까지 먹고 났는데 구글 맵에 따르면 시험장까지 45분밖에 안 걸린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수험표에 대기실이 없으니 너무 일찍 오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다- 싶어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었더니 다니엘이 일단 빨리 가라고 쫓아냈다.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RER(교외와 파리 시내를 연결하는 열차) C 호선은 처음 타보는 거였지만 자칭 지하철 전문가로서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한참을 신중하게 보다가 올라탄 열차가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말이다. 게다가 구글 맵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내가 시험이 시작된 지 10분이 지나서야 도착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경험이었다.



RER C는 유독 포크 구간이 많다.
펼쳐 놓은 노선도

내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1. 내려서 반대 방향으로 두 정거장 간 후 한번 더 내린 다음에 맞는 열차를 탄다.
2. 당장 내려서 택시를 탄다.

 2번을 택한다 해도 제시간에 도착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1번은 더더욱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한번 잘못 탔는데 두 번째에 똑바로 탈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그래서 나는 당장 열차를 내려 역 밖으로 뛰었다. 역에서 내릴 적에 우버를 호출했는데 바깥 택시 스탠드에 한 대가 서있길래 핸드폰에서 우버 창을 종료하고 택시로 뛰어가 차량 강도처럼 거칠게 문을 열었다. 아저씨는 프랑스어로 이미 콜을 받아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 말고 다른 택시 승강장에 가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미 당황할 대로 당황한 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저씨는 일단 타라고, 맞는 택시 승강장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여기까지만 해도 진짜 친절한 편이다, 아저씨가 그냥 창문을 닫고 무시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난다). 나는 산발한 머리와 극도의 불안이 담긴 표정으로 바깥을 두리번거렸는데, 아저씨가 어딜 가냐기에 졍빌리에라고 했다.


 ╲           ╱

                /

   ╲        ╱

  ╲   있잖아…   ╱

- -   그냥 졍빌리에까지  - - -

  ╱  태워다 줄게..가자..  ╲

 ╱  /

    ╱        ╲

          / |   

 세상에,,, 하늘의 부르심이었나. 방금 내가 뭘 들은 것인가. 지금 이 아저씨가 먼저 받은 콜도 무시하고 나를 시험장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 것이 맞는 건가. 지쟈쓰다,,, 이 자는 지쟈쓰의 현신이다.. 나는 고맙다고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뭐라도 드릴 수 있는 건 다 드리고 싶은데 가방에 있는 거라곤 시험장 앞에서 마스크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봐 여분으로 두 개 더 챙긴 K-마스크밖에 없었다. 그래도 있으면 쓰겠지... 이거라도 가방에 들어있었던 게 다행이다. 마스크를 받은 아저씨는 웬걸 싶은 표정이었지만 고맙다고 말해 주셨다. 그렇게 한 10분 달렸을까, 전화가 울렸다. 상대방은 내게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나는 이게 시험장에서 온 전화일 거라 확신했다. 작년 B1 시험을 연기하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시험 당일 한국의 택시에서 전화를 받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2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택시 안이라고 답했고 프로소디아(시험 주최 측)냐고 물었다. 상대는 통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가 내게 너 체리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불헌듯 우버 생각이 났다. 나는 창을 닫았지만 요청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이 무슨 민폐란 말인가.. 결국 멍청비용으로 30유로의 택시비와 6유로의 우버 취소 비용을 지불했다. 10유로 안팎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교통비였는데..!!

 시험장 앞에 도착한 건 39분이었다. 9시 40분까지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딱 맞는 시간이었다. 40분 동안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지선생님이 내 인생을 구했다! B2 시험에 낸 돈은 155유로인데(장소마다 다르며 파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는 200유로를 넘긴다고 들었다) 당연히 시험 시간에 늦는다고 환불을 해주지는 않기 때문에 이날 내가 지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155유로와 36유로의 멍청비용 때문에 울며 집으로 돌아가 다니엘이 퇴근할 때까지 어두컴컴한 집에서 청승을 떨었을 것이다.

 아침이 이 모양이었으니 '시험 망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나 이미 시험장에 제시간에 온 것만 해도 세미 기적 정도는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시험은 잘 봤고, 제일 걱정했던 건 말하기여서 다니엘이랑 열심히 연습을 했었는데 고양이 집사 맞춤 주제가 나온 덕분에 나는 '뚱뽀 고양이의 가호가 함께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물들에게 사료를 먹여야 하는가 사료를 먹이지 말아야 하는가
사료주의자인 뚱뽀고양이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략을 취했다

말하기 시험관이 공격적으로 물어봤다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을 것 같은데 다행히 말하기 시험관 두 분이 다 집사여서 결국 <고양이를 부탁해> 패널 모임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말하기만 오전에 따로 보고 쓰기, 읽기, 듣기는 오후에 2시간 반을 연달아 보는 바람에 하루 종일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그깟 게 무슨 대수인가..! 이렇게 만사에 감사해 보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시험을 다 보고 나니 집에 가서 다니엘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다 끝났다는 즐거움에 (시험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사정 얘기를 듣더니 RER을 같이 타 줘서 집까지는 무난하게 왔다) 아이스크림과 요구르트를 사서 집에 왔다. 다니엘은 "체리야!! 내가!! 내가!! 구글 맵 버리고 씨티맵퍼 쓰라고!!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이외에는 별 말을 하지 않았고 RER C 포크 구간에 대해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했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다 내 탓이지. 다 잘 지나갔지만 내가 택시 안에서 패닉에 절어 쓴 문자가 여전히 다니엘의 웃음벨로 남아있다. 지가 제일 패닉한 주제에 '다니엘아,,다니엘아 패닉하지 말고 들어. 내가 차를 잘못 탔는데 지금 택시 타서 다 잘 됐어'라고 썼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시험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5주, 그리고 증명서가 나오기까지는 4-6개월이 걸린단다. 하지만 취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내가 본 B2가 아니고 C1인 데다 기왕 공부하기 시작한 이상 흐름을 타서 C1까지 봐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라 올해 안에 C1까지 보고 싶다.


 아직 성적은 나오지도 않았지만.. 모든 영광은 프렌치 지쟈쓰, 그리고 어서 나가라고 쫓아내 준 다니엘, 그리고 딱 자기 같은 주제를 골라 편하게 시험 보게 해 준 뚱뽀 고양이에게 돌린다. 참으로 역동적인 하루였다.



원래 이렇게 썼었는데 어제 아침에 면접 합격 연락을 받아서 다음주부터 출근해요!!


 그래서 슬프지만.. 일과 C1 공부도..(쫌쫌따리) 병행하느라 이번 주부터 


- 격주로
-그리고 흑백으로!

 연재를 재개하려 해요. 건강도  챙기면서 30대의 저력, 노익장 보여드리겠읍니다... 열정 열정 열정!!!(요즘 한사랑 산악회를 열심히 봐요) 부디 C1에서 200유로 넘는 시험료를   내는  없이 합격할  있길 바랍니다..이런저런 사정으로 자꾸 휴재기를 가지지만 꾸준하게 봐주시는 여러분이 저의 에너지에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한번  웃고  다양한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어요. C1 합격하면 저도 두둥실 삼각산도 한강물도 두둥실 춤을   같읍니다... ..


체리 유튜브(특: 느림을 미덕으로 삼음) : 링크 클릭!

체리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cerise.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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