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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Apr 25. 2021

바보야 또 속냐

이 시험은 강한 놈들만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가 별로 눈물도 없고 약간 덤덤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니엘한테 물어보면 많이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 같다. 근 4년간 내가 우는 걸 제일 많이 본 사람이 다니엘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솔직히 내 잘못도 아닌데 델프 시험을 못 볼 뻔한 건 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농땡이 부리고 늦게 나와서 못 볼 뻔한 거 아니냐고? 오늘 할 얘기는 저번 화랑 또 다른 얘기다. 이번엔 내 책임이 아니다. 그렇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느껴졌던 수능 때는 아무 드라마도 없었는데-감히 불평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어학시험 보면서 이렇게 소재가 많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요즘은 프랑스에서 보는 델프 시험도 인터넷으로 접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런 기술적 발전의 가장 큰 특징은 내가 보는 시험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으로 다운받은 시험 응시 원서와 응시료를 내기 위한 수표, 신분증 사본을 봉투에 곱게 담아 보내려 했는데 내 글씨가 너무 작다 느낀 다니엘이 봉투를 회사로 가져가 새로 적은 봉투에 담아 보내 주었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지냈고, 내가 시험을 본 곳은 원서 접수 여부를 따로 통지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가 시험까지 3주가 남은 시점에 다니엘이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수표를 접수하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야 정상인데 통장에 돈이 나간 기록이 안 찍히니 말이다. 그러니 한번 확인 메일을 보내 보라고 했다. 그렇다. 다니엘은 단순히 시험공부만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이번화의 구원자는 다니엘이다. 당연히 접수가 됐겠거니 생각하며 쓴 메일은 혈압이 단숨에 치솟는 답변을 가지고 왔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메일 형식으로 써보았다. 이번 일로 이곳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나 시험료가 싸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C1 시험도 이곳에서 볼 예정인지라 메일 캡처를 그대로 썼다가 이들이 내게 화가 나면 곤란해지는 탓도 있다. 한 회차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원서가 잘못 처리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들에게 나를 특정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물론 그 사람들이 네이버를 볼 일은 추호도 없겠다만..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이었다. 첫 장의 메일이 오갈 때쯤엔 만약을 믿으며 계속 시험공부를 하는 긍정적 사고가 남아있었는데 이때부터는 아 다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다니엘은 그냥 하고 싶었던 게임이나 하면서 푹 쉬라고 했는데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평소처럼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쯤부터 급격히 말수가 줄고 어두운 데서 찡찡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다니엘이 아침마다 시험장에 전화를 했다. 전화에 응답하는 그들의 태도도 약간 이상했는데 위 메일에서 내가 '정보를 물어봐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내가 접수가 안 됐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었듯이 전화에서도 먼저 접수가 안 됐다고 대답을 한 후 다니엘이 통사정을 하자 내 정보를 물었다고 한다. 전화 연결 자체가 잘 안되기도 했지만 첫 번째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내 담당자한테 전달할 테니까 담당자의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고-당연히 연락은 안 왔다- 두 번째 사람도 담당자 타령을 하긴 했는데 다니엘이 그렇게 말해놓고 저번에도 연락 안 주지 않았냐 물으니 접수가 안 됐다고 먼저 말을 했단다. 그리고 세 번째 연결이 되었을 때 전화를 받은 직원은 놀랍게도 내가 접수가 되어있다고 말했단다.

 다니엘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한테 전화를 하긴 했는데 내가 또 삘삘(우리집에선 빌빌거리다의 좀 귀여운 버전 -> 삘삘로 말하곤 하는데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나쁜 의미로 쓰이고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 거리고 울까 봐 먼저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타일렀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이메일부터 꼭 쓰라'고. 물론 이메일부터 쓰기도 했고,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는데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래의 메일을 받았을 땐 대체 뭣 때문에 그런 삼류 유튜버 몰카 같은 짓거리를 한 거야?라는 의문도 들지 않고 순수하게 정말 기뻤다. 내가 메일로 사정사정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 셈 치고 접수해 준 것 같진 않고-특히 이미 서류를 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살짝 비꼰 대목에서- 아마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어디 끼어 있던 서류를 나중에야 찾은 게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내가 세상 끝난 사람처럼 침울해할 때 다니엘은 별일 아니라고, 저 사람들 말대로 6월 시험을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더 준비해서 C1을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델프는 결과가 나오는 데에 5주 남짓이 걸리는 시험이 아닌가. 시험 일정이 두 달에서 세 달 미뤄진다는 건 결과 수령이 또 세 달에서 네 달로 미뤄진다는 뜻이고, 나는 당장 정육점 가서 감자뼈 2킬로를 사려면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시험을 위한 공부만 하고 있는 게 싫어서 빨리 시험을 보고 치워버리고 싶었다. 당연히 취직도 중요한 요소였고, 언제까지나 시험공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그리고 B2 시험을 이미 통과한 상태에서 C1 시험을 준비한다면 최소 6개월의 준비 기간 동안 B2를 요구하는 직장에 지원하거나 관심 가는 학교에 지원도 해볼 수 있겠지만 B2를 못 친 상태에서 C1을 준비하는 건-물론 공인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직장도 있다. 요즘은 뭘 요구하느냐를 떠나서 공고 풀 자체가 너무 줄었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정말로 뭘 잘못해서, 하다못해 내가 수표 보내는 걸 잊어서 안된다는 거였으면 이해라도 되었을 텐데 정말 어떤 이유도 없이 시험을 못 보게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고시를 보는 것도 아닌데 몇 달이나 더 이 생활을 해야 하나 막막한 것도 한몫했고. 으아악!! 돈 벌고 싶다고!!! 시험 보게 해달라고!! 이런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정말 최악의 경우 시험장 측이 끝까지 정말 받은 게 없고 그만 전화해라 업무 방해라는 식으로 나오는 수도 있었는데 무사히 시험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 이렇게 다니엘이 하드캐리 한 시험을 나의 바보짓으로 못 볼뻔했으니 지난 화의 해프닝이 더 기가 막히다 하겠다. 너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전화하고 그래서 시험 보게 도왔는데 그걸 망칠뻔했다고!! 이렇게 생색낼 법도 한데 시험 본 날 자초지종 다 듣고 씨티맵퍼 깔라고 한마디만 한 다니엘....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안녕하세요! 체리입니다. 새 회사에서 벌써 일주일을 맞았네요. 회사에서 바로 고용하는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근할 때까지 정확히 어떤 일을 누구와 하게 되는지 잘 몰랐지만 헤드헌팅 사에서는 팀에 저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분들이 있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오해였습니다... 함께 하는 분들은 다 한국 분들인데 여자분은 저와 프랑스 분들 두 분이 있지만 같은 방이 아니어서 사실상 혼자나 다름없네요. 그래도 함께하시는 분들이 다 좋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다만 동료분들이 다 한국 분들이라 포스트나 브런치에 편안하게 회사 얘기를 하기는 힘들겠어요. 그래도 하는 일이랑 상관없는 일상 얘기가 생기면 기쁘게 들고 올게요! 다니엘한테 소재도 좀 부탁해보고.. 이미 다니엘 동료의 빵 터지는 얘기를 듣고 와서 비슷한 소재가 더 모이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직전에 했던 일이 약간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을 배우고 있는데요, 매일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만 재미있어서 다행입니다. 새로운 직장을 다닐 때마다 과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긴장을 많이 하는데요, 새 일터에서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계약기간이 끝날 때쯤엔 좀 더 노-련한 체리가 되어 있다면 좋겠네요. 하루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코로나 시국이지만 여러분도 잘 지내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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