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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May 09. 2021

슬득노멸

노브라를 잃고 슬리퍼를 얻다

원래 잘 체하는 체질이라서인가, 프랑스에서 브라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예전에 잠시 일할 때는 초반에만 잠시 착용하다가 안 하고 다니는 동료들이 꽤 있길래 그냥 안 했다. 하지만 이번 직장은 거의 한국 사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여자는 나 혼자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해야 한다. 매일 아침 브라를 집어 들 때 나도 모르게 인중이 쭉 늘어나긴 하지만 그게 대수겠는가. 이 얼마 만의 취업인데. 아무튼, 브라 착용 안건은 프랑스 회사라 하더라도 분위기를 봐가면서 맞출 생각이었기 때문에 불만 없다. 게다가 얻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이번 취업은 고용 형태가 직접 고용이 아니다. 중간에 헤드헌터가 끼어 있는데 그런 거치고도 출근 당일까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일하게 될지 거의 몰랐다. 그래서 출근 전까지 다니엘을 자꾸 볶으면서

"슬리퍼 신어도 되나? 한국인은 슬리퍼가 필수인데"
"회사에서 이 닦으면 뭐라 하나? 예전 회사에선 닦는 사람 (나 말고) 못 봤는데 너는 봤어?"

등의 질문을 많이 했다. 양치에 대해 질문했을 때는 온화하게 "이 닦는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야. 내 생각엔 괜찮을 것 같아"라고 답해준 다니엘이지만 슬리퍼에 대해 질문했을 때(특히 내가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신었던 슬리퍼를 보여줬을 때)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회사에서 슬리퍼를 신느냐는 거다. 그냥 운동화나 신으란다. 나는 늘 카카오 프렌즈 슬리퍼를 신고 싶었기 때문에 친구가 신는 어피치 슬리퍼를 보여줬더니 한층 더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만약 내가 사장인데 체리 네가 첫날부터 이런 슬리퍼를 신고 있다면 나는 너를 자를 거야... 그리고 너는 그래도 싸"

 다니엘이 내 사장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처음에는 어떤 환경에서 일하게 될지 거의 모르고 출근을 했기 때문에 첫 주에는 얌전히 운동화를 신었지만 지켜보니 사무실 사람들 책상에도 반가운 슬리퍼가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신이 나서 슬리퍼를 가방에 담자 다니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코로나 시국이라 마스크를 벗고 화장실에 오래 머무는 게 무섭기도 하고 같은 층의 프랑스 사람들이 이 닦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이 닦기는 일단 가글로 타협했다. 그렇게 새로이 시작될 직장 생활에 품은 의문과 공포가 해소되었고...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정확히 이런 상황에서 쓰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부한 거긴 하지만 또 이렇게 빨리 실전 무대에 놓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처음 헤드헌터한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어로 말하거나 메일을 써야 하는 상황은 약간 당황스럽다. 당황스러우면서 써먹을 데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다. 그중에 고역인 게 하나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내가 싫어하는 프랑스식 애저티(AZERTY) 자판인데 배열이야 Q와 A, 그리고 Z와 W처럼 바뀐 버튼이 몇 개 있을 뿐이라 그걸 외우면 끝이지만 위에 악센트가 들어간 E와 A 등은(é, è, ù, à, ç) 매번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찾은 후에 입력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나중에 캐나다식 프랑스어(우리에게 친숙한 쿼티 배열) 키보드를 하나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서 딱히 프랑스어로 메일 쓸 일도 없고 있다 해도 스마트폰 자판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에 아예 안 들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매일 확진자 수를 보지 않게 되었다. 봐봤자 5천 명 ~5만 명 사이겠지 뭐 이런 생각도 있고 내가 매일 조심하는 것은 변치 않는데 숫자가 이 모양인 이상 코로나에 걸려봤자 누굴 탓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렇다. 첫 월급이 나오기도 전에 가지고 싶었던 무선 이어폰과 새 베개를 샀다. 덤으로 조금 비싼 샴푸도 사봤다. 약간 황송한 기분으로 샴푸를 짰다. 나는 10년 후에도 이렇게 공손하게 약간 비싼 샴푸를 대하게 될까? 설렘이 남아있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늘 돈 자랑을 하는 다니엘의 상사 생각도 났다. 다니엘에게 자꾸 체리 일자리 좀 소개해 줄까? 라면서 해주지도 않을 호의로 자꾸 사람을 시험하는 버릇이 있는 아저씨다. 너희가 나를 집에 초대해서 맛난 밥을 만들어 준다면 내 한번 생각해 보지, 라면서 도깨비 김서방 메밀묵 착취하는 소리를 했던 그 아저씨. 비록 내가 지금 일을 내년에도 하지는 못하지만, 어이 아저씨, 댁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라고 혼자 비웃어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도 일이 안 구해져서 악마와 계약하는 심정으로 정말 거하게 한 상 차려놓고 놈(다니엘 상사)을 소환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참아내길 참으로 다행이다.




 안녕하세요 체리입니다!! 지난 11월에 B2 공부하느라 휴재 공지를 올렸었는데요. 당시에 구직도 해야 한다고 슬픈 소식을 알렸던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 이 소식도 나눌 수 있어서 참 기뻐요. B2 시험 합격했습니다 ㅠㅠ 시험 볼 기회조차 화려하게 날릴뻔했는데 거의 매일 작문 첨삭해주고 응원해준 다니엘한테 정말 고맙습니다! 나의 ... 나의 평강공주,.. ㅠㅠ 예전에 저는 이런 기쁜 소식이 있어도 한참 있다가 친한 친구 두 명 정도한테만 슬쩍 말하는 편이었는데 글 쓸 공간이 생기면서 성격이 조금 변했나 봐요. 요즘은 나눈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 또한 참 좋은 일이라 느낍니다. C1 시험도 꼭 보고 싶으니까 내년에라도 꼭 도전해 보려 해요. 2015년 시작할 즈음인가 아직 다니엘 만나기 전에 새해 버킷리스트에 프랑스어를 적어 넣었는데-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으니까- 그다음 해에 다니엘을 만나고 어찌어찌 만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날 적어 넣은 목표를 이뤘네요. 인생 정말 모르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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