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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Jul 04. 2021

태극기는 은십자가 될 수 있을까?

반중 감정이 남의 일일 수 없는 이유

각국이 백신 접종에 힘쓰고, 자가격리 기준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여행계에 활력이 돌아올락 말락 하는 이 시기, 우리나라 여행자들을 두렵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만행일 것이다. 프랑스에 살기 시작하면서 전보다 자주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락거린다. 프랑스어를 배웠어도 그게 내 나라말만큼 편할 리도 없거니와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는 탓에 한국 커뮤니티가 나의 가장 빠른 소식통이 된 것이다. 매일 아침 프랑스, 자가격리, 백신 이런 말들로 간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찾아본다.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조금씩 나오는 말들 중에 가장 가슴이 답답해졌던 글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중국인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공유하는 글이었다. 인종 차별 때문에 습격당하는 걸 막고 싶다는 의도였다.  


 당장 나부터가 언제 인종 차별에 노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다 보니 여행자들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백번 천 번 이해가 된다. 인간이란 약한 존재이기에 미지의 공포 앞에서 '아임 낫 차이니즈'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겠다는 현실성 없는 대안에 기대는 것도 이해한다. 무서운 상황이 닥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임 낫 차이니즈 티셔츠, 가방에 붙이는 태극기는 정말로 우리의 은십자요 쇠말뚝이 되어 인종차별주의자들을 퇴치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아니올시다 하고 답하련다. 절대 아니다. 가끔 나는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인종차별 상황에서 대처 능력이 살짝 떨어진다고 느낀다. 평생 '중국인'이라고 불린 적이 없기에 이 유럽 대륙에서 무식한 것들 눈에 띄는 모든 '노란 사람'의 이름이 중국인이 된다는 사실을 깜빡할 때 말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에 스며들 만큼 반복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파 속에서 나를 겨냥해 시노아즈(중국인), 니하오라고 하면 모르고 지나갈 때가 더 많다. 대부분의 경우같이 있던 사람이 대신 화를 내줘서 깨닫거나 같이 있던 사람이 나중에 알려준 덕분에 깨닫는다. 기분은 똑같이 나쁘지만.


 옛날엔 중국에 대한 반감을 다루는 기사나 그로 인한 피해 기사를 읽으면 '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사람들 당분간 신경 좀 쓰이겠네'라고도 생각했다. 완전히 남의 일로 취급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살면서 중국이 어떤 이유로든 욕을 먹는다면 그건 '중국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절대 '저 중국인 아닌데요'라는 말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도.


은밀하든 당당하든 우리는 어느 정도 차별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수많은 혐오 중 각자가 공감하는 혐오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을 다스리느냐 적극적으로 표현하느냐를 통해 걷는 길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과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는 일부 국경지역 주민이나 공동체의 사람이라면 이 작전이 먹힐 거라고? 당신이 그들 생각에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았'다면? 그들이 아는 '중국인' 구별법이 피부색뿐이라면? 그 태극기와 암낫차이니즈 티셔츠가 오히려 화를 돋우지는 않을지? 아니, 애초에 우리가 뭘 입고 뭘 가방에 붙였는지 그 사람들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당신은 그들 중 몇 퍼센트가 한국과 중국의 국기를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몇 퍼센트가 됐든 그게 우리 상상보다 아득히 낮을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자신도 중국을 싫어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중국을 욕하면서 여행을 한다면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논리를 펼치는 사람도 봤다. 그런데 애초에.. 그 사람들이 국적을 가려가면서 습격한다는 증거가 있나? 초록 여권 소지자는 피해 간다던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세 명만 모여도 싫은 놈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 사랑하라는 건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다. 특히 상대가 5천 년 넘게 싸워온 상대라면 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내 말은, 인생에 살기 위해 연대해야 하는 시기가 몇 번인가 오는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이 그 시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다니엘과 나는 소프라노스라는 미국 드라마를 즐겨봤다. 이 드라마는 미국에  사는 이탈리아계 마피아들의 이야기다. 인종차별 어휘도 아주 다양하게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마피아들이나 그들을 섬기는 양아치들이 입는 알록달록한 80년대 풍 나일론 트레이닝복이 있다. 코로나 이후 길을 걸을 때 내 뒤를 따라오던 흑인 남성과 아랍계 남성이 이 옷을 입고 있었다. 소프라노스만 안 봤어도 덜 무서웠을 것을.. 골목은 그날따라 한산해서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들이 '저 중국 여자'라고 하는 걸 들었다. 0.01초 만에 날아드는 생각은 '그럼 내 얘기는 아니네'였다. 그리고 그 골목을 지나 5분 정도 지났을 때 나는 그 골목에 나와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나는 습관적으로 창문이나 차량에 비친 반영을 보며 걷는다. 그러다 보면 꽤 그럴듯한 사진이 얻어걸릴 때가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건 나랑 그 남자들이 전부였다. 다행히 이 남자들은 내가 큰 골목으로 들어가자 금방 멀어졌다. 당시에는 외출을 많이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뭘 할 줄 알든, 어떤 사람이든 그들 눈에 비친 내가 그저 노란 중국 여자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곱씹는 하루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파리에서는 일본 관광객들이 염산을 맞았고, 애틀랜타에서는 네 명의 한국인 여성이 총에 맞아 숨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동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벽돌이나 망치, 주먹에 맞아 숨지거나 다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여러분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터로, 학교로 가는 동안에도. 그런데 이 저열한 폭력이 국적을 구별한다고? 그들이 우리 발을 걸고 머리채를 잡기 전에 여권 색을 물어볼까? 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여행지의 영사관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하고, 상대가 무기를 들었다면 무조건 도망칠 것. '친근감의 표시'라는 가해자의 정당화를 내면화하지 말고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을 것. 여행지에서 인종 차별을 겪는다면 가능한 데까지 기록을 남기고 다양한 채널로 공론화할 것. 이것이 코로나 시대 동양인 여행자가 기억해야 할 새로운 안전 수칙 아닐까. 인종 차별을 쫓는 은십자를 만드는 것은 연대이고 투쟁이지 결코 국적일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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