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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Jul 18. 2021

직장 생활 기담록

세계는 넓고 도른자는 많다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이 아멜리, 그리고 다른 한 명이 마티유다. 마티유는 최근에 실직을 했는데 하도 이상한 일터였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 유로 챔피언스 리그 시즌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축구나 보면 되겠다고 좋아했다. 아마 그것은 마티유가 우리 중 유일하게 무려 태어날 때부터 신탁 계좌가 있었던 명문가 도련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낙천주의일 수도 있겠다. 집세에 대한 부담도 없다 보니 하고 싶은 일에만 전념할 수 있어 콘서트도 하곤 하는데 나는 아직 가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이 마티유가 그만둔 그 직장은 짧은 기간 동안 이상한 요소를 많이 보여줬는데, 그중 으뜸은 물론 그의 (전) 동료라 하겠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날부터 묵직한 TMI를 발사해 마티유를 기함시켰는데, 첫 만남에서 그녀는 '여기서 일하지 않을 때 나는 성 노동자(Sex worker)야'라고 했단다. 마티유는 왜 굳이 그걸 나한테 말하나 싶은 마음이 무척 강했고 앞으로 그녀와의 업무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마티유가 일하는 곳은 잡화점이었는데, 면접을 봐준 매니저가 꽤 쾌활하고 재미있는 양반이라고 했다.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말이라도 예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점에 마티유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단다.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때 이 매니저는 마티유나 다른 직원들에게 '오늘도 나와 줘서 고마웠고 고생 많았습니다. 푹 쉬고 내일 봅시다' 같은 말로 격려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한 마티유는 스스로를 성 노동자라 밝힌 직원에게서 자신과 그녀 사이에 꽤 많은 공통의 예술가 친구들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필 마티유가 담배를 피우고 올 때 그녀의 통화를 듣고 말았는데 그녀는 위에서 말한 '좋은' 매니저의 상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단다. 내용은 '좋은' 매니저의 험담이었고, 그녀는 매니저가 성차별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기회를 많이 주지 않으며, 여성 고객들에게 부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역겨운 성차별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자신이 아닌 마티유와 다른 남자 동료에게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마티유는 그 시점에 딱 이 주일 정도밖에 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적어도 자신이 일하는 동안 매니저가 고객들에게 부적절한 응대를 하거나 마티유에게 대단한 기회씩이나 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매니저는 단골 고객들에게만 친근하게 농담을 했고, 농담을 들은 고객들은 빵 터져서 좋아하다가 물건을 사서 돌아갔단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이혼남이라 일주일에 한번 딸을 보는 게 인생의 낙이었는데 마티유의 동료는 끝내 말도 안 되는 중상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화에 대고 '그런 놈한테 딸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법원은 당장 그 애를 애비한테서 떼어놔야 한다고요, 그리고 당장 그놈을 자르셔야 해요'라고 했단다.


 마티유는 그냥 사람 좋은 아저씨인 매니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받는 것이 심히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그녀가 전혀 모르는 데다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공격하는 소시오패스라면 실제로 중간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 자신에게는 오죽할까 싶어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내가 그들이 해고할 당시 뭐라고 말했냐고 물었더니 마티유는 '예산 부족 때문에 사람을 잘라야 된대'라고 했다. 이 일이 발생하기 전 마티유는 고객이 한 명도 없을 때 그저 벽에 기대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쓴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슬픈 결말은 아니었다. 당사자도 만족하고 말이다.


 마티유가 훗날 들려주기를 마티유가 직장을 그만두던 날, 마티유의 여자친구인 루실이 광고주와 미팅을 하러 갔다고 한다-둘은 모델 일을 하다가 만났다-. 루실에게는 중요한 날이라 마티유는 아침부터 분위기를 칙칙하게 만들기 싫었다고 한다. 그냥 그녀가 집에 온 후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고 말할 작정으로 직장에서 짐을 챙겼고 하필 그날 미팅이 끝난 루실이 친구와 함께 마티유의 직장으로 찾아왔단다. 마티유는 그 시각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고...그의 이상한 (전) 동료는 한껏 과장된 목소리로 '세상에..마티유가 오늘 잘렸다고 말 안하던가요?'라고 했다고.


 루실의 친구는 마티유의 전 동료를 보자마자 귓속말로 '맙소사 나 쟤 알아, 쟤 진짜 미친 애야' 라고 했단다. 루실의 친구도 모델이었는데, 마티유의 전 동료는 한시간이 멀다 하고 왜 자기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루실 친구의 에이전시에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마티유는 그렇게 자기 친구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전 동료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어차피 잘릴 거 그녀를 자극하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말했다. 파리가 생각보다 너무 좁고 관심사가 겹치는 사람들이라면 주말에 나간 장소에서 마주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 충분히 공감이 갔다. 당장 나도 아예 엮이기 싫다는 이유로 소재로 쓸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다음 이야기는 내가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인 o의 이야기다. 편의상 그를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스로에게 준 직책)이라고 부르겠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고 그냥 하찮아 보이는 단어를 찾던 차에 이 단어의 역사적 배경이 눈에 띄어 관백이라 명명했다. 관백이는 크게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교묘한 터치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관백이의 터치는 얍삽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꼭 실수라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만 내게 닿았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을 싫어했기 때문에 같이 걷거나 애초에 그의 두 팔이 닿는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날 노력을 엄청나게 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했다면 100% 실수라고 생각할 접촉도 관백이 하면 대단히 의심스러웠다. 아무튼 그런 상태이니 그가 내 눈에 고와 보일 리가 없다는 건 충분히 아실 것이다.


 관백과 내가 근무하는 지역에는 흑인들이 많았다. 나는 출퇴근을 하면서 그게 어떻다고 의식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출퇴근 시간이 인적이 드물만한 시간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관백과 내가 역까지 가는 5분을 함께했던 날, 관백이는 내가 동양인이고 자신도 동양계이기 때문에 내가 당연히 동의할 거라는 어투로 이 동네에 레 누아(Les noirs: 흑인들)가 너무 많아서 안전하지 않다고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흑인들이 정말 많은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굳이 이런 말을 했다는 점으로 그의 인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관백이의 성량은 꽤 넉넉한 편이기 때문에 나는 심히 우울해졌다. 좋으나 싫으나 나는 이놈이랑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쪽팔리게 하지 말고 닥치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뿐이면 좋았을 것을...빤히 같은 팀 동료가 라마단 때문에 밥을 못 먹는 것을 보고도 내게 무슬림들은 참 이상하다고, 왜 밥을 안 먹느냐, 그 이상한 모자 하며 어쩌고저쩌고... 자기는 무슬림이 싫다고 사무실 칸막이 너머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람이 밥을 못 먹어 기운이 없어 한다면, 그게 매일 보는 사람이라면 측은해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관백이 딴에는 속삭일 셈이었던 것 같지만 워낙 목소리가 큰지라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관백의 역겨운 사상을 공유한다고 오해받는 것인데, 내가 가졌던 이 공포는 다니엘이 지속적으로 가져온 공포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니엘 역시 자신이 토마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토마의 극우 사상을 공유한다고 오해받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무서워하니 말이다.


 계속 울적한 얘기만 하면 여러분이 슬퍼질 것이기 때문에 웃기는 이야기도 하나 넣기로 했다. 다니엘의 직장 절친 에티엔에게 벌어진 일이다. 에티엔은 다니엘과 한 사무실을 같이 쓰는데, 몸이 안 좋아서 애초에 계약할 때부터 재택 위주로 하기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격으로 직장 컴퓨터에 접속하는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사무실 컴퓨터에서' 패스워드를 바꿔줘야 한단다. 어느 날 에띠엔은 고작 비밀번호 하나 바꾸자고 사무실에 들르기 싫어 다니엘에게 비밀번호를 바꿔달라고 했단다. 다니엘은 그 요청에 응해서 비밀번호를 Gros  baiseur6969로 바꿨다. 나는 굳이 유행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상 프랑스어만도 버겁기 때문에 아직도 이 단어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간단히 설명하면 Gros baiseur는 프랑스의 트위치 게임 방송 용어인데, 영어로 하면 그랜-드 쎅써라는 뜻이다. 주로 게임 진행자가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면 채팅창이 이 말로 도배된다고 한다. 아무튼... 에티엔은 다니엘과 취향이 아주 잘 맞아 사무실에서 둘만의 방구 오케스트라를 펼치는 사람이다 보니 바뀐 비밀번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고치러 온 IT 팀 사람이 비밀번호를 묻기 전까지는..... 암호가 뭐냐고 물었을 때 회사 사람에게 '그랜드 쎆써6969요(Gros baiseur6969)'라고 말해야 했을 그의 굴욕은 내게 짙은 공감성 수치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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