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 번째

달고 쓴 물속

by 체리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상태는 언제나 견디기 힘들다. 늘 가능한 건 아니더라도 원하는 일이 최고의 완성도로, 제 시간 안에 완료되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짜릿하다. 나의 이런 경향에는 약간 강박적인 측면도 있다. 해야 할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일이 넉넉하게 남아있더라도 무수한 인터넷 탭 사이를 방황하며 소리 없는 불안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목표를 세울 땐 '어차피 원하는 대로 된다는 보장 없으니 큰 목표를 세우자'라고 생각하면서 마감일이 다가오면 '원했던 그대로 해내야 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그동안은 창작자라면 꼭 필요한 기질이라고 생각하면서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생각만 바뀌었지 행동 방식은 바뀐 점이 없기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마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아무튼, 생각해 보니 내가 무도인도 아닌데. 왜 자꾸 고통만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 비해 좀 더 나를 믿는 쪽으로 변한 것 같다. 스스로를 쪼아대지 않아도 나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자고.

답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입시 때도, 대학원 재학 시에도 다른 길은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늘 시야를 협착하고 나를 불안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스트레스에 정수리가 뜨끈뜨끈해졌고, 두드러기에 시달렸었다. 한번 불안에 휩쓸린 대가는 이랬다. 제일 먼저 '행복'을 덜어내고, 다음으로 '여유'를 비웠다. 나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정의 탁자 위에 놓인 나를 위한 것들은 모두 쳐냈다.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전반적으로 나를 어리석게만 만들었을 뿐이라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공부나 일을 대하는 내 모습은 차안대를 쓰고 달리는 경주마 같다. 늦게나마 개선이 필요하다. 습관과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어떤 결과가 올 수 있는지 몸소 확인한 후이니만큼. 나는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느끼는 통증의 역치는 얼마나 쉽게 높아지던가, 자신에게 가하는 압박과 폭언이 얼마나 쉽게 잔인해지던가. 하지만 스스로를 짓누르고 생채기를 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진짜 있나? 그런 일이 있다면, 나를 짓누르고 생채기를 내서 결국 이루고 말아야 할 가치는 있나? 나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온 은하의 고양이를 구할 수 있다면 고려는 해보겠다. 힘든 일에는 늘 보람이 따른다. 나는 종종 그것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세차게 달려온 데에서 온 결실'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해냈을 것이다.


처음엔 세상에 나를 묶어둘 숙제가 필요했다. 매주 하나씩 쓰고 그리는 게시물의 연재는 그 숙제로 딱 알맞았다. 한결같이 사랑해온 일이었으며, 분량도 딱 좋은 무게감이었다. 글감에 대한 생각이 힘껏 굴린 실타래처럼 뻗어나가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도 받았다. 안 풀리는 순간의 쓴맛과 결국 시간 안에 완성하고 잠자리에 들 때의 달달함. 그것을 50주쯤 반복하니 이 달고 쓴 물속의 자맥질이 완전히 익숙해졌다. 차안대를 벗은 나도 빠르고 정확히 헤엄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불안이 덜하다. 이제는-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어서 그렇지- '스트레스받지 말자'는 말에 '스트레스를 주는데 어떻게 안 받냐고!'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게 나이 듦의 좋은 측면인가 보다.